항목 ID | GC015A0306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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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경래 |
“형님께서 매달 2,200환의 도움을 주시기로 하였으나 그 당시 행정공무원의 봉급으로 조카들 양육비며 살림살이에 나에게까지 신경 써줄 겨를이 없는 현실이었다. 어떻게 등록금을 마련하더라도 시작을 하였으니 끝은 맺어야 하겠고 매달 800환의 등록금 마련이 나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다 자취생활을 하는데 식량은 집에서 옥수수라도 가져다 먹어야 되는데 밥을 해 먹을 땔감을 마련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성인봉 중턱까지 올라가서 일년초 마른 죽대를 주워 모아 한 짐씩 만들어 걸머지고 와서 일주일의 땔감으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시내에 다니다 땔감으로 쓸 박스 조각이라도 눈에 띄면 주워 와서 불을 지피고 하였다.
요사이는 몸만 성하면 막노동할 자리는 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그 당시는 일자리는 적고 일을 할 사람은 많아 일자리를 구하기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김유만 교장선생님께서 다방면으로 활동하신 결과 외국 자금을 보조받아 지금의 울릉중학교 터에 학교를 세워 중·고등학교 병설로 운영하였는데, 방학 중에 학교를 짓는데 막일을 하려고 말씀드렸더니 허락하시지 않았다. 생각하다가 못해 조광혁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방학동안 학비를 마련하여야 2학기 등록을 할 수 있다고 애원을 드렸더니, 겨우 허락을 하여 주셔서 며칠을 하고 나니 그마저도 일거리가 끊어져서 그 후로는 오징어잡이를 하였다. 오징어잡이마저 애를 태우는 것이 방학 초에는 오징어가 잡히지 않다가 개학할 무렵부터 잡히기 시작하기 때문에 방학은 끝이 나가고 학비는 부족하고 해서 생각하다가 못해 지금은 고인이 되신 박준용과 최영해, 나 셋이 입장이 비슷하여 도동항에다 노를 저어 다니는 범선 한척을 가져다 두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밤에는 오징어잡이를 나갔다가 새벽녘이 되면 포구에 돌아 와서 잡은 오징어를 팔고 아침밥을 급히 해먹고 학교로 가고는 하였다. 때로는 오징어가 축이 차지 않을 때는 선생님들 댁을 찾아가 횟감이라고 드리고 오면 그 값의 몇 배가 넘는 공책이며 연필 등 학용품을 주셔서 고맙게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