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201537
한자 樓亭
이칭/별칭 정루(亭樓)·누각(樓閣)·정자(亭子)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지국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있는 사방을 넓게 볼 수 있도록 다락 구조로 높게 지은 건물.

[개설]

누정(樓亭)은 누각과 정자를 일컫는 명칭으로 정루(亭樓)라고도 한다. 일부 문헌에서 누(樓), 정(亭)을 비롯하여 당(堂)·대(臺)·각(閣)·헌(軒) 등을 포함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누정의 기능이나 역할에 대해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누정의 기능과 역할]

누정은 사방의 벽을 틔우고 언덕이나 대위에 높게 지은 중층 구조의 건축물을 말한다. 사람이 모이고 머무르는 곳으로 휴식과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반적으로 누정은 자연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 시대부터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 크게 성행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남성 중심의 공간으로서, 휴식 및 창작과 풍류를 즐기는 곳이자 강학과 각종 향촌 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 의성]

조선 시대 의성 지역은 의성현(義城縣), 비안현(比安縣),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인 단밀현(丹密縣), 보주(甫州)[예천(醴泉)]의 속현인 다인현(多仁縣), 용궁현(龍宮縣)의 일부분[현재 안사면 지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성의 누정]

조선 시대 의성 지역 누정에 대한 기록으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 續撰地理志)』·『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교남지(嶠南誌)』 등이 있다. 이들 문헌 자료와 근래 간행된 『의성 유적지』를 비롯한 『의성 군지』·『문화 유적 분포 지도』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 의성 지역에 위치한 누정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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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문헌을 통해 파악된 조선 시대 의성현의 누정은 총 24개 이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문소루(聞韶樓)로 추정된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의성에는 현 북쪽 작은 누[문소루]가 있었다고 한다고 한다. 자료 소략으로 그 내력을 알 수 없으나, 1247년에 경상도 안찰사로 재임 중이던 김지대(金之岱)가 지방 순시 중 누에 올라 읊은 시가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문소루임진왜란에 다행히 화를 입지 않았으나, 165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1694년 중건되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으로 없어진 것을 1981년 1월, 지금의 터에 준공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한편, 의성현의 누정을 행정 구역 별로 살펴보면 점곡면이 5개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단촌면·금성면 4개, 의성읍·춘산면 3개, 가음면 2개, 옥산면·사곡면·봉양면 1개 순이었다. 신평면, 안평면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가문별로는 안동 김씨 가문이 4개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해주 오씨 3개, 진성 이씨·영천 이씨·반남 박씨 2개, 풍산 류씨·함양 박씨·김해 김씨·용궁 전씨·달성 서씨·아산 장씨·동래 정씨·아주 신씨 가문 1개 순이었다. 관아 혹은 절, 소유자를 알 수 없는 누정이 3개였다. 현재 24개의 누정 중 동대(東臺)·병촌정(屛村亭)·유자정(孺子亭)·세심정(洗心亭)·냉천정(冷泉亭)·어락정(魚樂亭) 등 총 6개소는 남아 있지 않고, 나머지 18개소의 정자는 후손 등에 의해 중건·보존되었다.

비안현에는 총 5개의 누정이 파악되었다. 이 중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구요루(衢謠樓)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현의 동쪽에 구요루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안현 궁아(比安縣 宮衙)의 일부로 조선 태종 때의 비안 출신 박서생이 하윤(河崙)에게 받은 기문이 전해지는데, 이 기문은 구요루의 건립시기 뿐만이 아니라 비안현이 상주목(尙州牧)에서 독립현(獨立縣)이 된 이유가 기록되어 있어 학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구요루는 1530년(중종 25)에 인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까지 존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729년(영조 5년) 간행된 『비안여지승람(比安輿地勝覽)』에는 ‘금폐(今廢)’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안현의 5개 누정은 모두 비안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관아 소유가 2개, 병산 박씨·안동 김씨 소유 1개, 소유자를 알 수 없는 것 1개가 있다. 병산정(屛山亭)·오동정(梧桐亭) 2개의 정자만이 중건·보존되고 있다.

다인현에서는 구암정(龜岩亭) 하나만 파악되었다. 조선 후기 영월인 신일화(辛日和)[1760~1823]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달제 3길 150-4[달제리 92]에 위치한다.

단밀현에서는 9곳의 누정이 파악되었다. 이 중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은 관수루(觀水樓)이다. 관수루는 고려시대 중엽 건축된 것으로, 안동의 영호루(映湖樓),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와 함께 낙동강 삼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힌다. 고려·조선시대 여러 차례 중수와 개수가 있었으나, 1874년(고종 11)에 강물에 떠내려 간 후 중건하지 못하였다. 이후 양도학(梁道鶴)에 의해 중건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고, 당시 군수였던 신현택(申鉉澤)의 도움을 받아 1990년 5월 14일 복원되었다.

단밀현의 누정을 행정 구역 별로 살펴보면 단밀면 6개, 단북면 3개가 분포하고 있다. 가문별로는 아주 신씨 가문 소유 정자가 3개 진주 하씨·능성 구씨·성산 이씨 가문이 각 각 1개, 관아 소유 및 소유자를 알 수 없는 누정이 각 각 1개가 있다. 현재 관수루와 도호정(道湖亭)만이 중건·보존되었고, 나머지 누정은 현재 없다. 용궁현의 경우 조선 시대 누정이 파악되지 않았다.

이용자 의견
김** ㅇ 누정을 조선시대 기준으로 정리 했으나, 이는 현재의 상황과 상이하므로
현 시점을 기준으로 의성군의 누정을 소개해 주시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 합니다.
- 예을 들면 문소루는 고려시시대 부터 가운루, 우화루는 신라말기부터
존속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 누정의 역사는 이건, 개축, 중수 등의 과정을 거쳤므으로-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에 대한 보완은 자료 수집 후 추후 처리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2013.07.31
김** ㅇ 아래 누정을 추가로 등재 했으면 합니다.
1. 단밀면 낙정리 관수루
2. 의성읍 도동리 금운정
3. 금성면 수정리 용문정
4. 다인면 달제리 모운정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항목은 자료 수집 후 추후 수록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30
김** ㅇ 누정의 수량을 개, 공을 - 동으로 수정
ㅇ 유자정은 2010년 7월 4일중수하였고, 어락정은 1947년도에 건립한 것으로
2-3차례 정비하여 현존하는 건물이므로 수정요망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29
김** ㅇ 누정 가운데 어락정은 고기잡을 어(漁)가 아니고 물고기 어(魚)로
수정바랍니다.
  • 답변
  • 디지털의성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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