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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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이칭/별칭 | 왜란,임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백지국 |
발생|시작 장소 | 건마산 전투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건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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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장소 | 건마산 전투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건마산 |
발생|시작 장소 | 화장 산성 전투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화장산 |
종결 장소 | 화장 산성 전투 -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 화장산 |
관련 인물/단체 | 김응하|김응상|김응주|김치중|김치화|김치윤|김치홍|김치공|김치관 |
[정의]
1592년에서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상북도 의성군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 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두 차례 걸쳐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 조선·명(明)의 연합군이 벌인 전쟁이다. 1차 침입을 ‘임진왜란’, 2차 침입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하는데, 7년 간 두 차례에 걸친 침입을 통칭할 때는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역사적 배경]
16세기 후반 조선은 연산군에서 명종 대에 이르기까지 4대 사화(四大士禍)와 지배 계급간의 정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군포제(軍布制)가 실시되면서 농병 일치제가 사실상 붕괴되었고, 그것을 대치할 만한 새로운 제도를 확립하지 못한 채 명과의 친선 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일본 내 안정을 도모하고 기존의 다이묘[大名]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대륙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은 주변 국가의 정세 변동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파견한 통신사(通信使)마저도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러던 중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한 달 만에 수도가 함락되고 함경도까지 점령되는 등 전 국토가 유린당했다.
[경과]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제1군 중로(中路), 제2군 좌로(左路), 제3군 우로(右路)로 나뉘어 한성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의성 지역의 공격을 담당한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이었다. 제2군은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충주-죽산-용인-한성의 순서로 북상하였는데, 의성은 한성을 향하는 길목에서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남해안 일대나 일본군의 북상 길목에 위치한 지역보다는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상주가 함락되고 선조가 한성을 버리고 몽진을 하자 지역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특히 상주성에 주둔한 일본군들이 주변 군현에 자주 출몰하게 되면서 의성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곳곳에서 의병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의병의 규모가 크지 않아 활동이 용이하지 못하자, 안동을 본진으로 의성·예안·군위·의흥 등지의 사림이 일직현에서 동맹하여 안동 별읍 향병(安東 別邑 鄕兵)이라는 연합 부대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비안의 조서(趙瑞) 의병 부대도 여기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의성 지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전투로는 건마산(乾馬山)[걸마산, 부마산, 성재]에서의 전투와 화장산성(花藏山城)에서의 전투를 꼽을 수 있다. 건마산 전투는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의 의성 김씨(義城 金氏) 김치중(金致中)[?~1592]이 중심이 되어 단촌면에 위치한 건마산과 그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김치중을 비롯한 의병들은 크게 분전하였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들의 수적 우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하여 김치중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이 이야기가 조정에 알려져 1609년(광해군 1) 3월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각의 이름은 의열각(義烈閣)으로 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 228-5에 있다.
화장산성 전투 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산제리에 위치한 화장산성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전투이다.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비안현 주민들이 이곳에 들어가 항쟁을 벌이자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이미 비안현을 점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산성 공략을 포기하고 한성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를 저지한 비안 지역 주민들은 이후에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데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이 밖에 비안에 세거하는 선산 김씨 가문의 김희(金喜)[1529~1592]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출전하였으나 단밀에서 있었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결과]
7년 동안 전쟁 겪으며 조선의 8도 전체가 전장으로 변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엄청난 재산의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원군을 보내준 명에 보은해야 한다는 생각과 숭명사상(崇明思想)이 강화되어 차후에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일본 역시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력의 소모가 컸으며, 도요토미 가문의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시작으로 하는 바쿠후[幕府] 정권이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