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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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弘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출생 시기/일시 | 1600년 - 신홍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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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신홍망 별시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신홍망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652년 - 신홍망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신홍망 풍기 군수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73년 - 신홍망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91년 - 신홍망의 거처에 낙선당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4년 - 신홍망 유허비 건립 |
거주|이주지 | 신홍망 거주지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
묘소|단소 | 신홍망 묘소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 |
유허비 | 신홍망 유허비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아주(鵝洲) |
대표 관직 |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字)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신응규(申應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며, 아버지는 승지 신지제(申之悌)이고, 어머니는 함안 조씨(咸安 趙氏)로, 조지(趙址)의 딸이며, 부인은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활동 사항]
신홍망(申弘望)[1600~1673]은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급제한 뒤, 강릉 참봉(康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별시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645년 승문원 주서(承文院 注書)가 되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46년 전적(典籍)․병조 좌랑(兵曹 佐郞)․정언(正言), 1647년(인조 25) 예조 좌랑(禮曹 佐郞)․전주 판관(全州 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1652년(효종 3)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때 도승지 이시매(李時楳)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 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다. 이 때 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 신홍망은 이를 듣고 직접 그 소(疏)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
1656년 울산 부사(蔚山 府使), 1659년에는 풍기 군수(豊基 郡守)로 나아갈 때 수령들이 잇달아 관청에서 죽으며 흉흉한 소문이 일자,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라고 말하며 부임하였다 한다. 수령이 된 뒤에는 교육을 장려하는 데 힘썼으며 가난한 선비를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664년(현종 5) 강원도 도사(江原道 都事), 사예(司藝)를 두루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거의 나아가지 않았다. 말년에는 주로 고향인 의성의 거처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3권 2책의 『고송집(孤松集)』이 전해진다. 『고송집』은 신홍망의 증손인 신진구(申震龜)가 1739년(영조 15)에 간행하였다.
[묘소]
묘는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풍리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에 1984년 후손들 주도로 건립된 고송 신 선생 유허비(孤松申先生 遺墟碑)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