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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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之悌 |
이칭/별칭 | 오봉(梧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상리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용만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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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8년 - 신지제 증광 문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24년 - 사망 |
출생지 | 신지제 -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상리동] |
묘소 | 군북 우곡 |
성격 | 관료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증 이조 참판 |
[정의]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관료.
[가계]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 고려 충신 효자 신우의 후예이고, 구미파조(龜尾派祖) 신광귀(申光貴)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몽득(申夢得)이고, 부인은 함안 조씨(咸安 趙氏)이다. 아들은 신홍망(申弘望)이고, 형제로는 신지효(申之孝), 신지신(申之信), 신지의(申之義), 신지행(申之行), 신지경(申之敬), 신지훈(申之訓)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 학봉 김성일과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89년(선조 22) 증광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정언, 좌랑, 문학, 부사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예안 현감 때에는 죄수를 석방하여 농사에 전념토록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열읍이 붕괴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나라는 초토화되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경상북도 예안, 안동 겸관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구휼에 전념하였다. 의병 모집을 위해 단기(單騎)로 안동 용궁 방면으로 다니다가 왜병 70여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과거 훈방된 죄수가 은공을 갚아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예안, 안동 겸관으로 있을 때 구휼한 백성이 수천에 이르렀다.
다시 예안에 가서 의병장 김해(金垓)와 약속하여 피차 나라일로 목숨을 잃을 때에는 처자를 의탁하기로 하였다. 뒤에 김해는 경주 진중으로 출발하였고, 뒤에 순국하였다. 그 때 선생의 백씨가 왜군의 칼에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으며, 혈서로 중씨에게 “국가에 몸을 바쳤으니 나라 일에 전력하라.” 하였다. 그 길로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에 진을 쳤으나 1596년 4월 순찰 종사관의 명을 받아 순찰 임무를 띠고 팔공산에 이르러 열읍의 수령에게 전쟁에 나아가 “일사종시 동난사(一死終始 同難事).” 하도록 했다. 다시 함양 화왕산성에서 망우당 곽재우와 동맹 창의하고 국가에 충성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 끝날 때까지 통제사 종사관, 삼영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왜군이 물러난 후에는 여러 고을의 판관 등을 지냈다. 창원 부사 재직 시에는 명(明) 화적 정대립(鄭大立) 등을 잡은 공로로 교서를 받고 통정대부로 승진하였으며, 인조 때는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선무호성훈(宣武扈聖勳) 1등에 올랐다. 퇴관 후 권귀(權貴)를 탐하지 않고 낙향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10리나 되는 구미보를 축성하여 주변 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인조반정 후 인조의 엄소(嚴召)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저술 및 작품]
신지제의 전적·고문서의 수량은 8종 5책 78매이다. 원래 오봉 종택이 있는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251에 보관하였다가, 보존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한국 국학 진흥원에 위탁 관리하고 있다.
목록을 살펴보면, 필사 원본으로는 『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 『장사목록(長沙目錄)』[효종 3년 도승지 이시모의 탄핵 사건으로 평안도 벽당에 유배 갔을 때 일기], 『조선 팔도 지도(朝鮮 八道 地圖)』[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재사종의(齋舍宗議)』[기제(忌祭), 묘제(墓祭), 묘위토(墓位土)에 관한 완의(完議)], 『구미보 신장도목 완의(龜尾洑 新粧都目 完議)』[신지제가 축보(築洑)한 구미보에 관한 내력과 완의, 구미보 몽리호(蒙利戶)의 답수(畓數)와 경작자 명단, 수세액 등 기재, 시기는 17~19세기], 『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 『오봉집(梧峰集)』 4책 등이 있다. 고문서로는 신지제 부자의 교첩지 등 49매, 유지 2매, 교서 1매, 시권 3매, 혼례간 2매, 녹패 3매, 준호구 22매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전주 판관 재임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676년(숙종 2년) 이조 참판 증직이 내렸으며, 뒤에 사림의 공의가 준발하여 장대 서원을 창건하고, 송은 김수광,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장대 서원에 봉향되었다.
오봉 종택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이며, 전적·고문서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