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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소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899
한자 南部軍-小說-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922년 11월 25일 - 이태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975년연표보기~ - 이태 「남부군」[소설] 집필
편찬|간행 시기/일시 1988년연표보기 - 『남부군』[소설] 간행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97년 3월 6일 - 이태 사망
배경 지역 회문산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지도보기
성격 소설
작가 이태[1922. 11. 25~1997. 3. 6]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의 회문산 등에서 활동한 빨치산 남부군을 소재로 하여 1975년에 집필한 이태의 자전적 소설.

[개설]

「남부군」[소설]의 저자 이태의 본명은 이우태이다. 1922년 11월 25일에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났다. 1948년에 조선 신문 학원을 졸업하였고, 그해에 『서울 신문』 기자 시험에 수석 합격하여 8개월간 일하다가 합동 통신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인민군의 서울 진입 후 평양의 조선 중앙 통신사 기자로 흡수되어 전주로 내려가 통신 업무를 맡게 되었다.

1950년 9월 20일, 군산 앞 바다 오식도에 연합군이 상륙하자 전주 지사 기자들은 전라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무명 골짜기의 전라북도당 유격 사령부 대원이 되었다. 이태는 순창의 회문산 독수리 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개월을 보내다가 1952년에 낙오,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된 후 수감되었다가 의원 정해영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제6대 국회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75년부터 「남부군」의 집필에 들어갔으나 규제와 내용상의 이유로 출판하지 못하다가 1988년에 「남부군」이 간행되자 대대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태는 1997년 3월 6일에 급환으로 사망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남부군」, 「한글 공문 편람」, 「여순 병란」, 「천왕봉」, 수필집 『기다림』, 유고집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등이 있다.

「남부군」의 순창 지역 배경이 된 회문산은 전라북도 임실군, 순창군, 정읍시의 경계 지역으로 회문봉(回文峰)[830m]과 장군봉(將軍峰)[780m]이 있다. 안골 골짜기와 자연이 장관을 이루고, 구림천과 옥정호에서 흘러내린 섬진강회문산을 두 팔로 감싸듯 휘감고 나가다 장산천을 따라 하류로 흐르고 있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회문산 투구봉[장군봉], 동쪽으로는 지리산, 남쪽으로 무등산, 북쪽으로는 모악산이 바라다보인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산인데,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학 농민 운동과 한말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빨치산 전라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 잡아 700여 명의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빨치산 훈련장이었던 곳에 체력 단련장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빨치산 전라북도당 위원장 방준표회문산에 근거지를 두고 전라북도 유격대 조직에 들어갔고, 전라북도당 사령부는 순창군 구림면 여분산[엽운산, 구림면의 가막골을 주요 근거지로 삼아 구림면쌍치면에서 활동이 가장 많았음] 금산골의 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입산 초기 전주에서 대피해 온 도당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그 근방의 쌍치, 구림, 덕치, 칠보, 운암, 팔덕, 태인, 강진, 청웅 등 각 면의 민청원, 여맹원, 기타 기관원 등 약 300여 명이 주변에 초막을 지었으며, 10여 명씩 조를 짜고 6·25 전쟁 전에 빨치산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구빨치산들이 한 사람씩 붙어 조장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950년 12월에 정부는 남원 지역에 연대급 부대의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에 전념하게 하였다.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지전사]에 1951년 7월 제2대 사령관으로 신상묵 경무관이 새로 부임한 후 보아라 부대를 창설하였다. 보아라 부대는 귀순 빨치산들로 구성된 빨치산 토벌 부대이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 경찰 신분으로 바꾸어 빨치산을 잡으러 다시 산에 들어갔다. 보아라 부대는 1951년 10월부터 1953년 4월까지 1년 6개월간 존속하였다. 인원은 38명에서 시작되어 150명 정도까지 증원되었으나 평균 40여 명이 활동하였다.

1951년 10월 14일 새벽 1시, 38명의 전 대원이 내리 퍼붓는 폭우를 뚫고 산속으로 잠입하여 회문산의 골짜기를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30분 만에 빨치산 아지트를 발견하여 27명을 생포하였다. 생포자는 전라북도당 직속 100부대 5중대 중대장 이하 전 중대원과 도당 연락 요원들이었다. 이튿날 새벽 2시에 다시 제2차 회문산 기습을 감행하였고, 목표는 만일사(萬日寺)빨치산 아지트였다. 반항하는 자는 사살하였고, 손을 들고 나오는 자는 생포하였다.

[내용]

1950년 9월 말, 이태는 조선 중앙 통신사 기자로 전주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가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패전을 거듭하자 전투 대원으로 참가하라는 당의 지시를 받아 조선 노동당 유격대에 합류하게 된다. 전세의 변화에 따라 남부군은 부대를 개편하는데, 이때 이태는 ‘지리산 승리의 길’이란 『진중 신문』 편집과 전사 기록의 책임을 맡아 빨치산의 전투 활동을 기록한다. 얼마 후 빨치산에게 전투 회담의 소식이 전해지자, 북으로의 귀환과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가슴 부풀어 한다. 그러나 청룡 작전은 무너지고, 토벌대에 쫓기면서 부상당한 이태는 자신을 간호해 주던 박민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본대 복귀 명령으로 슬픈 이별을 하게 된다. 겨울은 깊어만 간다.

이태는 악담봉 전투에 참여하며 시인 김영을 만나 남북 동족 간 전쟁의 허무함을 토로하게 된다. 계속되는 전투에 쫓긴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밀려와 이현상(李鉉相)을 만나고, 이태는 대원 김희숙의 용감성에 놀란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부 소속의 정식 당원이 된다. 휴전 소식이 들리자 대원들 분위기는 어수선해지고, 남부군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다.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투쟁, 사기 저하로 남부군은 위기에 놓인다. 최후의 발악 같은 전투가 벌어지고, 대열에서 낙오된 이태는 눈 속을 헤매며, 결국 그의 빨치산 투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특징]

「남부군」은 북한에게마저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되어 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를 적나라하게 담아낸 기록이다. “대장 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 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 주세요”라는 어느 청년의 피맺힌 절규와, 겨울 산에 피를 뿌리고 숨져 가던 한 소녀의 못다 한 이야기 등을 기록해야겠다는 사명감에서 집필하였다고 한다. 빨치산과 군경을 합쳐 2만 명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 유격전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이 이태에 의해 남겨진 것이다. 이 밖에도 이태는 냉혹한 자가(自家) 숙청 등 빨치산 사회 내부의 모습을 들려준다. 대부분의 소설이 상상력을 기반으로 구성한 역사라면 「남부군」은 분식(粉飾) 없는 적나라한 사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남부군」빨치산을 소재로 한 초기적 작품으로, 이념의 문제보다는 이념 이전의 빨치산의 생존과 죽음이라는 생존 문제에 대하여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 이태는 집필 동기에서 철저하게 사실성에 입각하여 기록하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로 인해 리얼리티를 획득하였으며, 신빙성을 확보하고 있다. 장면 하나하나의 분위기와 대화, 인물 설정, 빨치산 용어들, 하루하루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위험한 상황, 극한 상황들 속에서의 인간관계들이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

[참고문헌]
  • 『남부군』(두레, 1988)
  • 『순창군 6·25 전사』(순창 문화원, 1988)
  • 교보 문고(http://www.kyobobook.co.kr)
  • 다음 카페 광주 민학회(http://top.cafe.daum.net/kjminhak)
  • 다음 카페 해남 한듬 산악회(http://cafe.daum.net/handum)
  • 씨네 21(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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