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599 |
---|---|
한자 | 美軍政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945년 9월 12일부터 1948년 8월까지 미군이 전라북도 순창군을 포함하여 38선 이남 지역을 통치한 기간.
[개설]
미군정기는 크게 두 기간으로 구분하는데 제1기는 1945년 9월 12일 아놀드(Archibald Arnold) 소장이 군정장관(軍政長官)에 임명된 시기부터 1947년 5월까지의 약 1년 8개월 동안으로 이 기간에 미군정은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남한을 통치하였다. 제2기는 1947년 6월 이후부터 소위 ‘남조선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소수의 한국인이 미군정의 위촉을 받아 행정을 담당했던 기간을 말한다.
[정치·사회면]
1945년 9월 9일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전라북도 지역에 미군정을 수립하기까지 거의 3개월이 소요되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다. 전라북도 지역은 이미 인민 위원회가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순창은 특히 인민 위원회가 강세였던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때 전국 인민 위원회 대표자 대회 회의록에서 보이는 순창 대표는 노명환(盧明煥)과 노장환(盧章煥)이었다.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 순창 인민 위원회 산하에는 자위대가 있었는데 1945년 10월 25일 인민 위원회 소속 단원이 경찰서장을 습격한 혐의로 인민 위원 8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또한 민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학회와 한글 학교, 협동조합 등을 산하 기관으로 두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는 좌우익 갈등 대립이 심각하던 시기로 좌익 청년 단체들이 1945년 12월 전국 청년 조직인 전조선 청년 총동맹(全朝鮮靑年總聯盟)을 결성하자 우익 세력은 12월 21일 이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를 총재와 부총재로 추대하여 대한 독립 촉성 청년 총연맹(大韓獨立促成勞動總聯盟)을 결성했다. 전라북도 순창군 연맹 지부 위원장은 김치봉(金致奉)이 맡았다. 활동은 좌익에 비해 미비했다.
[경제면]
당시 식량 공출 사항은 상당히 심각했다. 『지방 미군정 자료집』[1946. 8. 24]을 보면 남원~순창 간 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고 나오는데 이러한 도로 상황도 원활하지 않은 식량 공출에 한몫을 했다. 전라북도 지역 통치권 확보에 열을 올렸던 이유 중 하나는 곡창 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좌익 세력의 재정 기반이 될 거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1946년 추곡 수집 예상량 434만 8000석 중 전라북도 지역 공출 할당량은 79만 8000석이었을 정도로 매우 높았다.
전라북도의 좌익 세력은 미군정 정책을 방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쌀 공출을 막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결과 1946년 11월 29일 전국 쌀 공출은 13%를 달성했지만 전라북도 지역은 겨우 2.7%에 불과한 결과를 낳았다. 원활하지 않은 공출은 미군정의 강압적인 태도를 낳게 되었고 순창 지역은 미군정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