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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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945년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의 역사.
[해방 정국]
광복 후 1945년 9월 12일부터 1948년 8월까지는 미군정기였다. 1945년 9월 9일 한국에 진주한 미군이 전라북도 지역에 미군정을 수립하기까지는 거의 3개월이 소요되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다. 전라북도 지역은 이미 인민 위원회가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순창은 특히 인민 위원회가 강세였던 지역으로 분류된다.
[1950년대]
6·25 전쟁 당시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간인 학살도 많이 자행되었다. 1950년 9월 28일 구림면 주민 30여 명이 운남리 곡식 창고로 소집을 당한 후 운남리 방화천 변에서 인민군에게 학살당했다. 1950년 11월 6일에는 국군인 11사단 20연대 1대대가 순창 지구에 집결하고 12월 3일 순창군 동계면 신흥리에 진입하여 주민 9명을 살해했다. 이어 순창군 동계면 주월리에 진입하여 주민 14세 이하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15세 이상 50세 이하의 주민을 남녀 구별 없이 마을 회관 앞에 세워놓고 몽둥이와 칼로 학살했다. 이 외에도 11사단에 의한 학살은 계속 진행되었는데 『전북 도 의회 보고서』[1994]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에서 11사단에 의한 피해자가 664명, 경찰에 의한 피해자가 95명이었다고 한다. 11사단에 이어 임무를 교대한 8사단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1951년 4월 13일에는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주민 30여 명이 오봉리 곡골에서 희생당했으며, 4월 20일에는 쌍치면 용전리 묵산 마을 주민 20여 명이 국군에게 연행된 후 사라졌다. 4월 24일 국군 8사단 군인들이 총을 쏘면서 쌍치면 옥산리 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했으며, 4월 26일에는 쌍치면 탕곡리 최영진 등 10여 명이 희생당했다. 사람뿐만 아니었다. 8월 13일에는 빨치산의 은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만일사(萬日寺) 법당을 불태우자 법당을 지키려던 주지의 백모도 법당과 함께 불에 타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 국토가 피폐해졌는데 이는 순창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3월 11일자 『경향 신문』에는 순창의 다수 군민이 결식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농토를 버려 유랑한다는 내용의 기사도 보인다.
[1960년대 이후]
1963년에는 폭설이 내렸는데, 특히 순창군 쌍치면에서는 1m 20㎝의 눈이 쌓이기도 했다. 폭설로 인하여 순창의 쌀이 전국으로 공급되는데 차질을 빚어 결국 쌀값이 폭등하였다. 5·16 군사 정부의 통제 가격인 두당 195원 선을 돌파하여 200원까지 급등하는 지역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9년 5월 1일에는 순창면이 순창읍으로 승격되어 행정 구역이 1읍 10면 131리 273분리로 개편되었다. 2007년 10월 5일에 1읍 10면 131리 303분리로, 2009년에 1읍 10면 131리 304분리로 개편되었다. 인구는 2008년 3만 920명, 2009년 3만 179명, 2010년 3만 209명, 2011년 2만 9497명, 2012년 3만 55명으로 여타 농촌 지역과 같이 증가율이 저조하다. 이에 인구 증가를 위해 순창군에서는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고 있다. 즉 부 또는 모 주소지가 순창으로 된지 1년이 지난 경우에는 첫째 아이에게 220만 원, 둘째 아이에게 460만 원을 지급하며, 셋째 아이에게는 1000만 원, 넷째 아이는 1200만 원, 다섯째 아이 이상은 15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2014년 현재 순창군의 캐릭터 ‘초롱비’는 군민의 소리를 경청하는 큰 귀와 맑은 눈을 가진 남녀로 제작됐으며, 순창군을 상징하는 동식물은 까치[새], 느티나무[나무], 백일홍[꽃]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