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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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金百悅旌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효자길 200-10[내판리 520]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순영 |
건립 시기/일시 | 1913년 - 효자 김백열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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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2년 - 효자 김백열 정려 중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효자 김백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4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김백열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효자 김백열 정려 연기군 향토유적 제4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효자 김백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효자길 200-10[내판리 520] |
원소재지 | 효자 김백열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효자길 200-10[내판리 520]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안동김씨 문중 |
관리자 | 안동김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내판리에 있는 김백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김백열 정려는 김백열(金百悅)[1816~186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김백열은 본관이 안동, 자는 여행(汝行)이다. 김방경의 현손이며, 고려 후기 공양왕 대에 삼사(三司) 우사(右使)를 지내고 이성계를 적극적으로 도와 개국 1등 공신으로 태종 대에 좌정승을 지낸 후 익원공의 시호를 받은 김사형(金士衡)의 17세손이다.
김백열은 1816년(순조 16) 김희중(金熙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5세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병에 들어 자리에 눕자 매일같이 병환을 지켜보고 지성으로 간호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곶감이 아버지의 병에 특효가 있다고 일러 주었다. 날이 밝아 김백열이 곶감을 구하여 드시게 하니 과연 며칠 만에 차도를 보이고 완쾌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조선환여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김백열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주시 강내면 당곡리에 있다.
[위치]
연동면 소재지인 내판리 내판역에서 남쪽으로 500m 정도 가면 하리마을이 나온다. 효자 김백열 정려는 하리마을에서 외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길가에 남향으로 자리해 있다.
[변천]
효자 김백열 정려는 1890년(고종 27)에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증직(贈職)[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받고 명정 받은 안동김씨 효자 김백열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명정 당시에 바로 건립되지 못하고 1913년에 후손인 김조묵 등의 주도 아래 연기군 동면 내판 하리마을에 건립되었다.
1982년에 군비 80만 원을 보조받아 기와 전부를 교체하고 단청과 방풍시설, 기둥, 기단 등 일체를 보수하였다.
[형태]
1982년에 중수된 현재의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하고 있다. 시멘트 바닥 위에 정려를 세웠으며, 8각 고주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사면에 홍살을 돌렸고,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 시설을 해 놓았다.
현재 석축을 쌓아 기단을 올려 정려를 세웠으며, 전면에는 돌계단을 만들고 나머지 3면은 철책을 둘렀다. 소나무 한 그루와 향나무 등으로 주변을 정화하였다.
[현황]
정려의 내부 중앙에는 효자 김백열이 1890년(고종 27) 동몽교관을 증직 받아 면장인 최용식(崔龍植)의 주창으로 건립되었음을 기록한 현판[孝子金百悅贈童蒙敎官朝奉大夫之閭 大正貳年八月 日 面長 崔龍植 主唱 建築, 128×36㎝]이 걸려 있다.
현판은 붉은색 주칠에 글씨는 모두 하얀색 주칠을 하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大正貳年八月 日’ 부분만 흰색 주칠을 쓰지 않아 드러나지 않는다.
효자 김백열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김백열 정려는 5세의 어린 나이부터 효도를 실천한 김백열의 효행을 후세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