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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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공식명칭 | Joseon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세종 지역의 역사.
[개설]
세종특별자치시는 조선시대에 연기현(燕岐縣)과 전의현(全義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독립적인 행정 구역으로서 독자적인 변천 및 역사와 함께 지리적 환경, 정치와 군사, 사회경제, 각종 국가시설, 성씨와 인물 등 다양한 문화적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세종 지역의 연혁]
세종특별자치시의 조선시대 연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연기군과 전의현의 역사를 나눌 필요가 있다. 연기군은 백제 때 적현성(赤峴城)·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으며,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치고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연기현은 1018년(현종 9) 청주에 영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파견하였으며, 목주감무(木州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1397년(태조 6)에 목주감무와 분리하여 연기현에도 감무가 임명되었다. 1414년(태종 14)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쳐 전기현(全岐縣)이라고 하였다가 1416년(태종 16)에 다시 연기현과 전의현을 분리하였다. 연기현에 현감을 파견하고 연기향교를 창건하여 중국의 4성 5현(四聖五賢)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셨다. 연기현은 1680년(숙종 6) 문의현(文義縣)에 병합되었다가 1685년(숙종 11)에 분리·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공주부 연기군이 되었고 1896년에는 충청남도 연기군이 되었다. 1909년 전의면 일원과 공주군 일부[양아리 명탄]를 편입, 동·서·남·북·전의·전동·금남의 7개 면을 두었다. 1911년에는 군청을 남면 연기리에서 조치원으로 이전하였다. 1914년에 연기군은 전의군 전 지역과 공주군 일부를 편입하여 7개 면을 두었다. 2005년 5월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 위한 특별법, 2010년 12월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각각 제정·공포됨에 따라 2012년 6월 충청남도 연기군이 폐지되고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다.
전의현은 백제 때 구지현(仇知縣)이었다가 삼국통일기에는 구지(久遲)로 고쳤고, 동명주(東明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이후 금지(金池)로 고쳤다가 대록군(大麓郡)[지금의 천안시 목천면]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940년(태조 23)에 금지현을 전의현으로 고치고 청주목에 속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1395년(태조 4)에는 전의현에 처음으로 감무가 임명되었다가 1414년(태종 14)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쳐 전기현(全岐縣)이라고 하였다. 1416년에 전의현으로 다시 복설하여 현감을 파견하고, 같은 해 전의향교도 창건하여 중국의 4성 5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셨다.
전의현은 목천·천안·청주·연기 등지와 연결되는 교통 요지로 1895년 공주부 전의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는 충청남도 전의군이 되었다. 1909년에 전의 지역이 공주군 일원과 함께 연기군에 편입되면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전의는 연기군에 병합되었다. 2005년 3월 18일에는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에 포함되었다. 이후 2010년 12월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됨에 따라 2012년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었다.
[사회와 경제]
조선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연기현의 토지는 땅이 기름진 것이 적고 메마른 것이 많으며, 간전(墾田)은 2,916결이고 그중 논이 5분의 2에 좀 모자란다 하였다. 호수는 348호, 인구는 1,446명,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8명, 진군(鎭軍)이 10명, 선군(船軍)이 1백 5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의현은 차가운 기후이고 땅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1,575결이고 그중 논이 4분의 1에 좀 모자란다 하였다. 호수가 166호, 인구가 572명, 군정은 시위군이 2명, 선군이 9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연기현의 토산품으로는 토의(土宜)에 오곡과 조·팥·메밀·뽕나무, 토공(土貢)으로 대추·칠·잡깃·여우가죽[狐皮]·삵괭이가죽[狸皮]·수달피(水獺皮), 약재는 인삼·산골[自然洞]·마름[菱仁]이 있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현의 토산(土産)으로 자기(磁器)와 도기(陶器), 게[蟹]를 기록하고 있다. 전의현의 토의(土宜)는 기장·벼·조이고, 토공(土貢)은 지초·대추·감·잘[山獺皮]·여우가죽·호도·칠·족제비털·잡깃[雜羽], 약재는 인삼·백출(白朮)로 적혀 있다. 토산(土産)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철(鐵)[현 동쪽 서방리]·자기(磁器)·지초(紫草)·복령(茯苓)·안식향(安息香)으로 적혀 있다. 전의현 관정리에는 이른바 ‘왕의 물’이 있다. 이 물은 한글 창제를 위하여 많은 책을 보다가 실명 위기에 이른 세종대왕의 눈병을 깨끗이 치료한 약수로, 전의초수(全義椒水)라고도 불린다.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연기현의 토성(土姓)으로 위(魏)·하(河)·전(全)·경(耿)·장(萇), 내성(來姓)으로 왕(王), 속성(續姓)으로 김(金)·강(康)이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연기현의 성씨를 언급하면서 순서가 약간 달라져 전(全)·경(耿)·장(萇)·하(河)·위(魏)로 기록되고 김(金)·강(康)은 속성(續姓), 왕(王)은 내성(來姓)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도 동일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의현의 토성(土姓)으로 이(李)·유(兪), 망성(亡姓)으로 하(河), 차성(次姓)으로 전(全)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李), 유(兪), 하(河), 전(全)이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는 전의이씨 한 성씨만 등재되었다.
[향·소·부곡]
향(鄕)·소(所)·부곡(部曲)은 군현과 다른 특수 행정조직으로써 그중 소는 전문적인 물품 생산에 종사하는 공장(工匠) 등 천민의 집단 거주지였다. 소의 주민은 전문 기술자인 장인과 장인의 물품 생산을 돕기 위한 각종 역(役)을 부담하는 금(金)·은(銀)·염(鹽)·묵(墨) 등의 호(戶)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종 지역의 향·소·부곡으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곳을 보면 대부향(大部鄕)[전의현 북쪽 6리], 덕평부곡(德平部曲)[동국여지승람에는 덕평향으로 기록], 가을정처(加乙井處)[전의현 북쪽 5리], 토흥부곡(土興部曲)[연기현 북쪽 13리], 연천소(鳶川所)[연기현 남쪽 10리]가 있다. 자기소(磁器所)[연기현 북쪽 요혜방, 전의현 서쪽 망현리·남쪽 송현리], 도기소(陶器所)[연기현 북쪽 요혜방, 전의 서쪽 부동리], 철장(鐵場)[전의현 동쪽 서방동] 등도 있었다.
[군사, 교통·통신 시설]
정치·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 시대 대표적인 시설로는 산성·읍성과 진(鎭)을 들 수 있다. 산성 유적으로는 연기현 성산성(城山城)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천 6백 71척이었으나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라고 전하였다. 전의현 유적으로는 이도(李棹)가 살던 곳이라는 이성(李城), 증산고성(甑山古城)[서북쪽 5리], 고산고성(高山古城)[동쪽 8리], 운주산고성(雲住山古城)[금이성(金伊城) 동남쪽 8리]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육상 운송을 위한 역원(驛院)제, 통신을 위한 봉수제(烽燧制)도 실시되었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는 대략 12㎞[30리]마다 역원을 두고 말을 제공하며, 진상 등 관물 수송도 담당하였다. 전의현에는 금사역(金沙驛)[남쪽 5리], 고라원(高羅院)[동쪽 16리, 경원(鯨院)이라고도 함], 송현원(松峴院)[남쪽 8리], 근현원(根峴院)[북쪽 21리], 신원(新院)[동쪽 14리], 동진원(東津院)[동쪽 5리], 포곡역(蒲谷驛)[동쪽 18리]의 옛터가 있었다.
봉수 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설치된 통신 수단이었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로 각각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5개로 각각 신호하였다. 세종 지역의 봉수로는 연기현의 용수산(龍帥山)이 있는데 동쪽으로 청주의 저성(猪城), 서쪽으로 공주의 독성(禿城)과 연결된다.
한편 나루로는 동진(東津)이 있어 문의(文義)·회인(懷仁)으로 연결되고, 나리진(羅里津)은 유성(儒城)·진잠(鎭岑)으로 연결된다.
[풍속]
『신증동국여지승람』 ‘연기현’ 풍속조에 “백성들이 농사에 부지런히 힘쓰고 남을 고자질하는 풍습이 없다.”라고 하였으며, “사람들은 화평하여 함께 생업을 즐기고 장사꾼과 나그네도 양식 싸 가지고 갈 필요가 없네.”라며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윤기가 노래하였다고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