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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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瓦窯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조인진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에 있는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운용된 기왓가마터.
[진안군의 와요지]
진안군 관내에는 모두 7개소의 와요지가 보고되었으며, 이 중 월계리 와요지, 와룡리 와요지, 월포리 와요지, 모정리 두곡 와요지, 단양리 와요지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나머지는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곳이다.
발굴 조사된 유적 중 와룡리·월계리·월포리·모정리 두곡 와요지는 용담댐 수몰 지구 내에 속한 유적으로 진안군의 와요지 조사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진안군 전체 와요지에 대한 속성을 파악하는 데 무리가 있다.
지표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은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지표상에 노출된 기와 편만을 대상으로 추정한 것이므로 충분한 의견을 제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중 월계리 와요지와 와룡리 와요지가 삼국 시대에 해당하며 월포리 와요지가 고려 시대, 나머지는 모두 조선 시대 와요지이다.
[와룡리 와요지]
와룡리 와요지는 모두 3기의 기왓가마가 확인되었다. 3기의 가마는 모두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는 반지하식의 오름 가마로, 아궁이, 연소실, 소성실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수키와와 암키와로 구분되며 3기의 가마가 동시기에 번조하였던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3호 가마는 기와를 굽는 과정에서 폐기되어 기와를 어떻게 쌓아 가마를 운영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월계리 와요지]
월계리 와요지는 발굴 조사 결과 2기의 와요지가 확인되었다. 1호 와요는 풍화 화강암층을 파 내려간 후 천장을 구축한 반지하식 등요이다. 입지는 구릉의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아궁이, 연소, 소성부가 남아 있는데 연도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2호 와요는 풍화 화강암층을 뚫어 축조한 지하식 등요로 바닥은 돌로 단을 쌓아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1호 와요지의 소성부[연도부]와 중복되며 1호 와요지의 위쪽에 자리한다. 와요는 아궁이, 연소, 소성, 연통부가 모두 잘 남아 있고, 보조 연통부도 확인되었다. 무단식 암키와와 무단식 수키와로 나뉘며 막새 종류는 전혀 출토되지 않아 암, 수키와 전용 가마였음을 알 수 있다. 와요의 형태와 기와를 통해 볼 때 백제 시대 끝 무렵에 운영되던 와요로 추정된다.
[월포리 와요지]
월포리 와요지는 기왓가마 2기와 가마 관련 시설로 추정되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유구 1기가 있어 1기의 가마만이 성격 파악이 가능하였다. 기왓가마는 자연 경사면을 활용한 등요로 남아있는 길이 400㎝, 최대 폭 220㎝가량 된다. 가마는 소성실과 연소실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은 수키와와 암키와만 출토되었으며 다른 유물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된 기와는 등문양이나 제작 수법 등이 고려 중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단양리 와요지]
단양리 와요지는 와요는 단단한 풍화 화강암층을 뚫어 조성한 지하식 등요로 소성부의 천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와요는 요전부, 아궁이부 연소부, 소성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연도부의 근접한 곳에는 출입 시설이나 불길의 유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부속 시설이 있다.
조선 시대 와요는 단양리 와요지만 어느 정도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진안군에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해서 와요지가 운용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구제 발굴로 국한되어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와요에 대한 보다 정밀한 자료를 파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최근 진안 도통리의 초기 청자 가마가 학술 조사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진안군에서도 가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진안군의 와요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체계적으로 와요지의 성격이 파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