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6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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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樂寺址 |
영어음역 | Jangnaksaji |
영어의미역 | Jangnaksa Temple Sit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 65-2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인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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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4년부터 2008년 |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 65-2 |
성격 | 절터 |
관리자 | 제천시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삼국 시대~조선 시대 절터.
[개설]
제천 지역에서 확인된 불교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인 삼국 시대에 창건된 불교 유적이다. 통일 신라~조선 시대[18세기경]에 폐사될 때까지 5차에 걸쳐 중창이 이루어졌던 충청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이다.
[변천]
장락사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이래 17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 시대로, 조사 지역 전체에서 유구가 확인되었다. 초창기인 삼국 시대 유구는 제7건물지와 폐와무지에서 확인되었다. 기와류의 제작 시기를 토대로 할 때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으로서의 모습을 비로소 갖추게 되는 시기는 제1차 중창기인 통일 신라 때이다. 제2차 중창기는 12세기경으로 여겨진다. 장락사에 있어 가장 규모가 큰 중창 불사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제3차 중창기인 고려 후기에는 중심 축선이 변하고, 사역이 축소되었다. 제4차 중창기는 분청사기와 백자, 기와류를 볼 때 조선 전기인 1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제5차 중창기는 사역의 범위도 좀 더 좁아지고 동쪽으로 더욱 편중되었다. 18세기 이후의 유물이 극히 소량인 점을 볼 때 장락사는 늦어도 18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 65-2번지 일원의 고암천 변에 있다. 제천역에서 영월로 가는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중고 자동차 매매 단지가 나타난다. 도로 변의 ‘장락사’라는 표지석에서 동쪽으로 400m 정도 더 가면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에 이른다. 절터는 석탑과 북쪽의 넓은 대지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장락사지에는 삼국 시대에 제작된 막새와 평기와들이 있는데, 제천 지역 불교문화의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문화재적 가치와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의 역사 환경과 가람의 변천 과정 등이 명확하게 연구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제천시에서는 장락사지의 역사와 가람의 규모, 시대적 변천 과정을 밝히고, 문화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자 학술 조사를 충청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하였다. 충청대학교 박물관에서는 2003년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의 정밀 실측과 사지의 일부 지역을 시굴, 조사하였고,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장락사지 전 지역에 대하여 세 차례의 정밀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장락사지는 제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 시대 불교 유적으로, 그동안의 발굴 조사에서 34개 동의 건물지, 담장 4개소, 답도 3개소, 부석 시설 등의 유구와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기와류, 토기류, 자기류, 토제류, 석제류, 금속제류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가장 수가 많고,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기와류이다. 삼국 시대의 연화문 수막새와 무문 암막새, 승문 및 선문·사격자문 평기와 등은 제작 시기가 6세기 후반~7세기 초경으로 추정되고 있어 관련 분야 연구자들은 물론 제천의 역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삼국 시대 기와들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된다면 기와의 시기 편년과 제작 기술의 전파 과정, 나아가 고대 문화의 전파 경로를 규명하는 데 귀중한 단서가 될 것이라고 기대된다.
장락사지의 삼국 시대 때의 유구는 제7건물지와 폐와무지에서 확인되었다. 장락사가 사원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시기는 제1차 중창기인 통일 신라 시대이다. 출토된 기와류와 토기류, 당간지주 등의 시대 편년을 근거로 할 때 늦어도 9세기 중반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에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과 제1건물지를 비롯한 6개동의 건물지와 담장이 축조된다. 석탑을 가장 남단에 두고, 북쪽으로 4개 동의 건물을 남북 방향으로 배치하면서 서쪽에는 사역을 출입하는 문지 2개 동을 담장과 함께 조성하였다. 비록 석탑이 사찰 중심에 놓이는 전형적인 가람 배치는 아니지만 남북 자오선 상에 배치하는 통식(通式)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중창기는 12세기경으로 여겨진다. 장락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기와류와 청자류 중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중창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장락사(長樂寺)’라는 사명이 밝혀진 것이다. 명문기와가 출토되지 않아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까지 있었던 사찰명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장(長)’자명 명문기와를 볼 때 고려 후기부터는 ‘장락사’라는 사명으로 법맥을 이어왔음이 확인되었다. 장락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창 불사가 이루어진 시기는 고려 전기이다. 사역 전체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건물지가 조사되었고, 유물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통일 신라 때의 가람 배치를 유지하면서 많은 불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때에 새로이 건립된 건물은 13개 동이고, 이전 시기의 건물을 재사용하거나 그 터에 중건한 건물은 3개 동이다. 또한 사역 조성과 보호를 위한 기반 시설인 부석 시설과 북서쪽을 두르는 ‘담장 2’와 답도들이 축조되었다. 고려 전기 장락사의 또 다른 특징은 서향 건물의 등장이다. 기본적으로는 남북 방향의 축선에는 변화가 없지만, 중앙부 동쪽에 서향을 한 큰 건물과 기단 시설을 조성하면서 축선의 새로운 변화를 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도 이 시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완형의 모전 석탑재가 고려 전기에 건립된 기단 석열 조성에 전용되었다는 것은 모전 석탑의 해체 복원 작업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인 셈이다.
제3차 중창기인 고려 후기 장락사의 가장 큰 변화는 중심 축선의 변화와 사역의 축소이다. 조사 지역의 남쪽에 자리하던 제2차 중창기의 중심 건물인 제1건물지, 제6건물지, 제8건물지, 제9건물지가 모두 폐기되면서 사찰의 중심이 좀 더 북쪽으로 옮겨갔고, 서향을 한 제15건물지와 제13건물지를 중심으로 축선이 변화하게 된다. 이때 새로이 축조된 건물지는 5개 동이고, 기존 건물을 재사용하거나 터에 중건한 건물은 5개 동이다. 사역 서쪽의 부석 시설과 ‘담장 2’도 재사용하였다.
제4차 중창기는 분청사기와 백자, 기와류를 볼 때 조선 전기인 1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1407년(태종 7)에 제천의 자복사(資福寺)로 정해진 사실을 보아서는 고려 이후 이때까지도 천태종 계열의 명찰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새로이 축조된 건물은 4개 동이고, 재사용하거나 중건된 건물은 3개동이다. 제5차 중창기에는 사역의 범위도 좀 더 좁아지게 되고, 동쪽으로 더욱 편중되게 된다. 유구 기단토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볼 때 16세기~1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새로이 축조되는 건물은 4개 동이고, 재사용하거나 기존의 터에 중건된 건물은 1개 동이다. 18세기 이후의 유물이 극히 소량인 점을 볼 때 장락사는 늦어도 18세기경에는 폐사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장락사지의 동쪽에는 현대에 지은 장락사가 있고, 서쪽으로는 고암천이 흘러 남쪽에서 제천천에 합류한다. 사지의 남쪽에는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이 있고, 사지 내에서는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기와류가 많이 수습되었다. 발굴 조사가 마무리된 후 지금은 일부 건물 터의 초석을 살려 건물의 모습을 살리고, 다른 지역은 잔디를 심어 정비하였다.
[의의와 평가]
첫째, 장락사지는 제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 시대 불교 유적이다. 나아가 충청북도 지역 내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 유적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에 전하는 ‘장락사’의 실체는 유물로써 증명되었고, 삼국 시대 창건 이후 조선 시대에 폐사되기까지 다섯 차례의 중창과 그에 따른 사찰의 변화 과정 또한 발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둘째, 그동안 ‘통일 신라 설’과 ‘고려 전기 설’로 이견이 있었던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의 건립 연대가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 신라 후기에 건립되었고, 이후 고려 전기에 중건된 사실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셋째, 사원 내의 중심 역할을 하는 사탑과 달리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은 국가 경영의 중추인 교통로의 운영과 신앙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위해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고층화된 석탑은 먼 곳에서도 조망되게 함으로써 핵심 교통로 상의 표식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과 기원을 드리는 예배 대상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장락사지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강원도 남서부를 잇는 중심축에 놓이는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석탑과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모든 결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장락사지 연구는 경상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한강을 잇는 고대 교통로 연구의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문화[불교문화]의 전파 및 융합 과정의 특성을 밝히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또한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 석탑을 비롯한 모전석탑이나 전탑의 건립 목적과 조성에 있어서 지리적, 지형적 특성의 고찰을 통해 우리나라 모전석탑과 전탑의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지역에 집중된 이유를 규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