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유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500576
한자 遲山遺稿
영어공식명칭 Jisanyug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동촌리
시대 근대/구한말,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봉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지산유고』 편찬
간행 시기/일시 1947년연표보기 - 『지산유고』 간행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반포동 산60-1]
성격 문집
저자 소진덕
편자 소화영
간행자 석판본
권책 3권 1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7.5×18.1㎝
어미 상하향 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
권수제 지산유고
판심제 지산유고

[정의]

전라북도 익산 출신의 근대기 한학자 소진덕의 문집.

[개설]

『지산유고(遲山遺稿)』는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난 근대 시기의 한학자 소진덕(蘇鎭德)[1869~1943]의 문집이다. 3권 1책의 석판본으로, 1947년 1월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1935년 3월 소학규(蘇學奎)가 지었으며 발문은 1946년 조영래(曺榮來), 한익교(韓翊敎), 아들 소화영(蘇華永)이 지었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

소진덕은 자는 명숙(明淑), 호는 지산(遲山),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소자파(蘇自坡)의 장남인 소세온(蘇世溫)의 후손으로서 아버지는 소신규(蘇信逵),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치종(致鍾)의 딸이다. 원래는 소신규의 아우 소창규(蘇昌逵)의 아들인데, 소신규가 일찍 죽어서 양자로 들어간 것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친아버지인 소창규가 위독하자 몸소 탕약을 달이고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으며, 손수 장례를 치렀다. 또한 소창규에게 후사가 없자 두 어머니와 문중 어른들과 상의하여 소세량(蘇世良)의 후손 소항규(蘇恒圭)의 둘째 아들 소진석(蘇鎭碩)을 양자로 들였다.

스물세 살 때에는 양어머니 최씨 부인의 상을 당하여 엄격하게 상례를 지켰다. 친어머니 정씨(鄭氏)에게도 극진히 효성을 다하였고, 아흔한 살 나이로 세상을 뜨자 삼년상을 치렀다. 1934년부터는 7년 동안 향교 임원으로 봉직하였고, 위선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선조의 산소를 보수하고 전답과 재실을 마련하였다. 가숙(家塾)[한 개인이나 집안에서 꾸리는 글방]을 차려서 자손 교육에 힘쓰다가, 1943년 9월 23일 일흔다섯 살로 생을 마쳤다.

[편찬/간행 경위]

소진덕의 아들 소화영이 1945년에 소진덕의 글 중에서 늘그막에 지은 글만을 모아서 상·하편으로 만들고 부록을 붙여 1책으로 만들어서 1947년 1월에 간행하였다.

[형태/서지]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책의 사주(四周)에 두 개의 검은 선이 돌려진 사주 쌍변(四周雙邊)이며, 반곽은 19.9×14.9㎝이고, 10행 20자이다. 어미는 상하향 이엽화문어미(上下向二葉花紋魚尾)이며, 책의 크기는 27.5×18.1㎝이다.

[구성/내용]

『지산유고』는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시(詩), 2권은 문(文), 3권은 부록(附錄)이다. 책머리는 서문과 목록이다, 서문은 1935년 3월 소학규가 지은 것으로서, 저자인 소진덕의 덕행과 아들 소화영이 문집을 편찬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권1은 오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절구, 칠언율시가 실려 있다. 오언절구는 초당(草堂)의 달밤에 지은 「야제(夜題)」부터 부인 유씨의 오빠 유종근(柳宗根)을 만나서 지은 「봉부형유윤중종근(逢婦兄柳允仲宗根)」까지 6수이다. 지인(知人)과의 만남이나 한가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다. 오언율시는 친동생 소진석의 죽음을 애도한 「도본생제진석(悼本生弟鎭碩)」부터 채석강을 유람한 「유채석강(遊彩石江)」까지 10수인데, 봉래산 월명암에 올랐을 때 지은 「등봉래산월명암(登蓬萊山月明菴)」과 「유채석강」은 호은(湖隱) 소병규(蘇昺奎)와 참봉 김창원(金彰遠)이 동행하며 읊은 시로, 서로 상대 시의 운자(韻字)에 화답하는 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실제 소진덕이 지은 시는 7수이다. 50살이 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시도 있다.

칠언절구는 월명암 봉래루에서 지은 「등봉래루(登蓬萊樓)」 두 수부터 만송(晩松) 이기응(李機應)이 쓴 시의 운자를 따서 지은 「차만송이우(次晩松李友)」까지 모두 스무 수이다. 내소사와 적벽강, 부여, 내장산, 지리산 등을 유람한 시, 지인의 방문, 자신의 처소와 처지에 대한 술회, 모내기와 같은 일상생활을 노래하고 있다. 칠언율시는 정상진(鄭象鎭)이 생을 마감하자 지어 보낸 「만정겸산상진(挽鄭謙山象鎭)」부터 월명암 현판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차월명암판상운(次月明菴板上韻)」까지 백서른여섯 수에 이른다. 시의 내용도 다양하여서 죽음에 대한 애도부터 회갑연, 고적이나 명승지에서의 소감, 향교나 사당, 정자 등지에서 열린 시회나 종회, 지인의 방문과 송별, 새봄이나 한 해가 바뀔 때의 감상, 전원생활 등 다양한 소재를 노래하였다.

권2는 서간과 서(序), 기(記), 일기(日記),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서간은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친동생 소진석을 격려하는 편지, 문집이나 족보 간행,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문중 간에 왕래한 편지, 지인 간에 소식을 주고받은 편지 등 9편의 서간이 실려 있다. 서(序)는 1926년 지은 「풍천임씨종계서(豊川任氏宗契序)」, 외사촌동생인 전주이씨 이현구(李顯九)의 후손을 보존하고자 하여 소진덕과 아들 소화영·소찬영(蘇瓚永)이 함께 1923년 계를 만들었다는 「존후계서(存後契序)」가 실려 있다. 기(記)는 1938년 소진덕의 문중에서 건립한 익산 금마 지역의 도산재(道山齋) 기록 문서와 1938년 익산 용화산 아래 건립된 화암서원(花巖書院)의 ‘격치재 중건기(中建記)’, 1939년 장손 소병욱(蘇秉郁)이 도산재 아래 과수원에 지은 정자를 ‘무본정(務本亭)’이라 이름하고 그 유래를 설명한 기록 문서 등이 실려 있다. 일기는 「봉래유람일기(蓬萊遊覽日記)」로, 1917년 3월 28일부터 4월 8일까지 익산에서 출발하여 전주, 고부를 거쳐 봉래산[전라북도 부안의 변산] 월명암을 갔다가 김제를 거쳐 집에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방문지의 풍광을 시간대별로 소상히 기록하였다. 매일의 여정을 시간대별로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사회와 세태, 문학 등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상량문은 1937년 9월 9일 도산재의 상량을 올릴 때의 글이다. 제문은 며느리 연안이씨(延安李氏)가 죽은 지 두 돌 만에 지내는 제사인 대상(大祥) 때 지은 글이다.

권3은 부록이다. 「지산서실기(遲山書室記)」, 제문, 가장(家狀), 묘갈명이 실려 있다. 「지산서실기」는 1936년 소진덕이 일흔 가까운 나이에 용화산 남쪽 포전촌(浦田村)에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독서하려고 서실을 세우자, 소학규가 소진덕의 공적과 학덕을 찬미한 글이다. 제문은 세 편인데, 소진덕이 죽자 오기문(吳基文), 소학규, 김학순(金學純)이 보내온 것이다. 가장(家狀)은 1944년 12월에 아들 소화영이 지었고, 묘갈명은 1945년 2월 진사 소학규가 지었다. 책 끝머리는 발문으로서 1946년 조영래(曺榮來), 한익교(韓翊敎)과 소진덕의 아들 소화영이 지었다.

[의의와 평가]

『지산유고』소진덕이 살아가던 당시, 특히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대적 격변기의 사회적 상황과 세태, 문학을 살펴보는 데에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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