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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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炳注文學-河東 |
영어의미역 | lifeline of Novelist Yi Byeongju's Works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영훈 |
[개설]
경상남도 하동군은 이병주(李炳注)[1921~1992]가 나고 자란 고향이고, 이병주 문학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며, 이병주 문학을 가능하게 한 젖줄과도 같은 곳이다. 대하소설 『지리산』을 비롯해 이병주가 쓴 소설에는 하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데, 이들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하동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병주 작품 속 인물들의 고향 마을 하동]
하동은 이병주가 나고 자란 곳이다. 이병주는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안남골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이병주의 소설에는 고향인 하동과 인근 마을 출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병주의 대표작인 『관부연락선』의 유태림, 『지리산』의 이규·하준규·박태영, 미완성 최후 작인 『별이 차가운 밤에』의 박달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유정도 빼놓을 수 없다. 「빈영출」, 「내일 없는 그날」, 「배신의 강」, 「그 해 5월」, 「세우지 않은 비명」, 「망명의 늪」, 「목격자」 등 여러 작품에서도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대개 이병주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병주의 문학 속 하동 풍경]
이병주의 소설에는 하동에서 나고 자란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하동의 모습과 하동에 대한 이병주의 느낌, 하동의 정치적·역사적 의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빈영출」이라는 소설에는 주인공 성유정이 나고 자란 고향 마을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성유정의 고향은 지리산이 남쪽으로 뻗은 지맥(支脈) 가운데 이루어진 조그마한 분지, 하북면(河北面)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인구는 7, 8천. 한마디로 말해 특색이란 전연 없는, 그저 평범하기만 한 산촌(山村)이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황톳물을 이루어 범람하기도 하지만 여느 때엔 간신히 물줄기가 자갈밭을 누비고 있는 보잘것없는 시내, 높은 산이랬자 표고(標高) 3, 4백 미터가 고작인 야산, 들은 넓은 곳이래야 폭이 5,6백 미터가 될까 말까. 이조 시대를 말하면 기껏 진사(進士) 벼슬이나 참봉(參奉) 벼슬이 수삼 명 있었을 정도. 해방 후 이 고장 출신 최고의 벼슬이 경위였다던가, 경감이었던가.
이런 곳을 두고 “산하(山河)는 의구(依舊)한데 인걸(人傑)은 간 곳 없다”는 등의 시상(詩想)이 나타날 까닭도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나라에 그처럼 흔한 시인(詩人) 한 사람 이 고장에선 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성유정이 추억, 또는 회상에 따른 정감(情感)을 섞어 고향을 그려 보려고 해도 지긋지긋하게 평범하고 쓸쓸한 풍경화로 될 뿐이다.“
성유정의 고향인 하북면은 지리산 남쪽에 위치해 있고, 주위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 둘러 서 있다. 북천면이 이명산[높이 570m]·천황봉[높이 576m]·탕건봉, 비안봉·하일봉·마안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고, 농경지보다 임야가 많은 곳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곳이 실제 북천면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북면(河北面)이라는 이름 역시 하동군(河東郡) 북천면(北川面)을 줄여서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지리산 남쪽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하동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다.
“하동을 내 고향이라고 하지만 내가 나고 자라며 소년기를 보낸 진짜 고향은 하동군 가운데서도 북천면(北川面)이란 곳이다. 서울에 앉아 고향의 산천을 그려 보면 꿈나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경치가 좋다는 뜻이 아니다. 전형적인 산수화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산, 그러한 시내, 그러한 들, 그러한 돌, 그러한 집들로 이루어진 가난한 마을과 마을에 불과하다.
봄이 되어도 꽃 같은 꽃도 피지 않는다. 산 이곳저곳, 들 이곳저곳에 꽃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산만해서 꽃다운 정서가 풍겨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적(古蹟)다운 고적도 없다. 유서(由緖)를 지닌 곳도 없다. 조그마한 암자는 있었지만 사찰다운 사찰도 없다. 그야말로 벽촌이다. 두 갈래 시내가 있긴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전설적인 용소(龍沼)라는 것도 없다. 딴 곳. 딴 곳처럼 흔한 용 한 마리가 우리 고장엔 없는 것이다.“
이병주에게 하동은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곳이다. 하동은 여느 시골 마을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 다른 고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용소 같은 곳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다. 이름을 대면 누구라도 알 만한 특출한 인물이 난 적도 없고,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할 만한 아름다운 자연을 거느리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런 하동이 그에게는 크나큰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의 뒤쪽에서 이병주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처럼 쓰고 있으면 무미건조할 뿐이고 사실 그러한데 어째서 고향이 그토록 그리우니 모를 일이다. 들을 누비는 길, 산을 기어 오른 오솔길,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능선, 아니 풀 한 포기, 돌 하나까지 안타까우리만큼 그리운 것이다.”
하동은 이병주에게 안타까울 만큼 그리운 곳이다. 내세울 것이 없기에 더더욱 그리운 곳, 그곳이 바로 이병주의 고향 하동이다.
[지리산과 하동의 근현대사]
이렇다 하게 내세울 것이 없는 곳이라고는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동이 갖는 정치적·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리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리산은 식민지 시절 항일 투쟁의 주요 근거지였고, 독립운동가들이 숨어 살던 곳이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병주 자신도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병주의 여러 소설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동이 갖는 정치적·역사적 의미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대하소설 『지리산』이다. 『지리산』에 견줄 만한 소설로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있다. 『태백산맥』이 전라남도 벌교를 뿌리로 한 빨치산의 역사를 다루었다면, 『지리산』은 하동에 맥을 둔 빨치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하준규 등이 학도병 징집을 피해 괘관산[함양]으로 입산하여 보광당(普光黨)을 결성하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괘관산을 택한 것은, 이곳이 지리산과 덕유산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산과 골짜기가 깊어 보급 투쟁이 수월하고 몸을 숨기기도 쉽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들은 이현상의 권유로 공산당원이 되었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결국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쥘부채」라는 소설에는 지리산 밑이 고향인 동기생 최가 나온다. 최는 학생회 간부가 교실에 들어와 데모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자 반대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소신대로 행동하려는 것이 비겁한지, 자기의 소신을 굽히고까지 부화뇌동하는 것이 비겁한지는 각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겠지요. 나는 지리산 밑에서 자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죽었습니다. 옳건 그르건 소신대로 죽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덴 본의 아니게 뇌동하다가 죽은 자도 많을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뇌동하다가 죽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랐습니다. 나는 뇌동하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랐습니다.”
지리산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지리산의 정치적·역사적 의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지리산에서 죽은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빨치산이었거나 사회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찬동하지 않거나 이념에 무지한 채 입산한 경우도 있었고, 빨치산에 부역했다는 혐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이병주 자신도 이런 혐의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괴로워해야 했다. 그는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연극 동맹을 맡았고, 이와 관련하여 진주경찰서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부풀려져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나기도 했다. 또한 죽은 뒤에는, 이병주가 해인사 경내에 피신해 있다 그곳을 습격한 빨치산 부대장 김간도를 만나고, 그를 따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기사가 유력 월간지에 실리기도 했다[그 기사는 오보였다].
이런 가운데 이병주가 『지리산』 같은 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 역사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알리는 데 얼마만한 책무감을 느꼈는지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병주의 정치 외도]
이병주는 4·19 혁명 후 혁신계로 하동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일이 있다. 그가 선거에 출마한 것은 1954년 3대, 1960년 5대 국회의원 선거였고,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많은 표를 얻었다. 이병주의 집안이 8천 석 운운하는 전설이 있는 집안이었고, 아버지가 인심을 얻어 지주이고 우익이었음에도 6·25 전쟁 당시 공산당조차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에 그만큼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일은 「패자의 관」이라는 소설에 비교적 사실과 가깝게 그려져 있다. 소설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노신호는 국회의원이 되면 어떻게 하더라도 남북통일을 서두르는 방향으로 노력해 보겠다고 했다.
“다시는 이런 참화가 없게 하기 위해선 국민들도 통일에 성의를 가져야 하고 국회의원의 제일의적(第一義的) 의무가 통일의 성취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말한 노신호의 눈빛과 말투는 진지했다. 노신호는 가혹한 법률을 없앨 것과, 특히 부역(附逆)했다는 죄목으로 중형(重刑)을 받은 사람들의 구제를 서둘겠노라고 했다.
“국민의 일부가 부역을 하도록 하는 상황을 만든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 책임을 따질 수 없다면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국민을 벌할 수 없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하는 책무를 다하고 나서야 범법자를 다룰 수 있는 명분이 서는 겁니다. 일제에 아부하고 편승한 사람들을 불문에 붙여 놓고 참담한 전란통에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중형을 과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합리합니다. 부역자는 이를 벌할 것이 아니라 부둥켜안고 울어야 합니다. 허기야 그 가운덴 악질도 있겠죠. 양민을 해친 놈들 말입니다. 그런 부류만을 가려내면 되는 겁니다.”
그는 농업의 진흥을 주축으로 한 공업화(工業化)에 관한 자기의 비전을 설명했다. 하천 공사, 간척지 매립, 독산 개발(禿山 開發)을 통한 국토의 확장, 유휴 노동력의 이용 방안 등, 정밀한 숫자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방면에 상당한 연구를 쌓았다는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고 그 말에 설득력도 있었다.
보다도 내가 그에게 혹한 것은 그의 문학과 철학에 관한 깊은 소양(素養)이었다. 나이 30 남짓한 사람이 언제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을까 하고 놀랄 만큼 사회사상, 정치사상에 도통해 있었다.“
이병주의 삶을 아는 사람이라면 노신호가 그의 분신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노신호는 선거를 치르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노신호는 어느 모로 보아도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인간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적인 인격을 갖춘 사람을 진실한 반공인(反共人)이라고 볼 때 노신호는 훌륭한 반공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도 그 후의 노신호는 빨갱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국이 일단 노신호를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고 난 뒤는 계속 그가 빨갱이라는 증거 될 수가 있는 사실만을 수집해서 기록에 보태는 모양이었다. 그 기록이 노신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 것은 물론이다.”
선거에 진 노신호는 결국 공사장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죽게 된다. 이병주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고 정치를 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가 정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겠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이병주가 정치를 통해 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하동이 낳은 이병주 문학]
이병주의 작품 가운데는 그가 나고 자란 곳인 하동을 배경으로 하여 실제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것이 상당히 많다. 이병주가 하동의 역사를 세세하게 그려 나갈 목적으로 작품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이병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뒤따라가면서 하동이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한 재능 있는 작가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하동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병주 문학관의 관장으로 일하는 최증수는 일전에 이병주 기념사업 추진을 제안하면서 “이병주의 작품 세계에 일관되게 흐르는 예술혼은 우리 하동의 향토 사랑이며 험난한 시대를 용기 있게 살아간 치열한 작가 정신”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하동은 이병주 문학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며, 이병주 문학을 가능하게 한 젖줄과도 같은 곳이라 부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