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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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老 |
영어음역 | Yi Inro |
이칭/별칭 | 득옥(得玉),미수(眉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고려 후기 하동을 유람한 문신.
[가계]
초명은 득옥(得玉)이며, 자는 미수(眉叟),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경원 이씨(慶源李氏)는 고려 전기 최고의 문벌 가문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었는데, 친족인 화엄 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이 거두었다. 아들은 이정(李程), 이양(李穰), 이온 등인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활동 사항]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요일의 보호 아래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1170년(의종 24) 19세 때 정중부(鄭仲夫)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뒤에 환속하여 25세 때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배웠으며, 1180년(명종 10) 29세 때 진사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명종 12)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고, 이듬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書記)로 임명되었다. 그 뒤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이인로는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조칙(詔勅)을 지어야 하는 막중한 업무 속에서 겨를을 틈타 시사(詩詞)를 지으면서도 막힘이 없어, ‘배 안에 작품이 가득하다’는 뜻의 ‘복고(腹藁)’로 일컬어졌다.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을 즐기며, 이른바 ‘죽림고회(竹林高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신종 때에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재직하다가 고종 초년에 비서감(秘書監)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승진되었으며, 1220년(고종 6) 나이 69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1. 이인로의 문학과 저서
이인로의 문학 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시를 짓는 데 ‘표현과 내용이 모두 오묘할 것[語意俱妙]’을 강조하였다. 표현의 오묘함을 위해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이 없는 자연 생성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며, 내용의 오묘함을 위해서는 참신함을 중시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서는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이것은 이인로가 자신의 문학적 역량에 대해 자부심이 컸지만, 관직 생활이 순탄하지 않아 이상과 현실 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저서로는 『은대집(銀臺集)』·『쌍명재집(雙明齋集)』·『파한집(破閑集)』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파한집』만이 전한다.
2. 지리산 유람 기록
이인로는 청학동을 찾아 하동의 화개현(花開縣)을 유람하며 시를 짓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하동의 화개현을 유람하며 청학동을 찾은 사실은 『파한집(破閑集)』에 「청학동(靑鶴洞)」과 「청학동기(靑鶴洞記)」로 기록되어 있다.
「청학동기(靑鶴洞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금나라 영내의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과 꽃받침처럼 잘 어우러진 봉우리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 천 리에 서리어 맺히었다. 백두산 주위에 10여 고을이나 있는데, 한 달 이상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이 산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사람이 겨우 다닐 만큼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다. 구부리고 기어서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마을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좋은 농토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그 동네를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등진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집터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한다. 예전에 나는 집안의 형 최상국(崔相國)과 함께 영원히 속세를 떠날 뜻이 있어서, 이 고을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살림살이를 담은 큰 고리짝을 두세 마리 소에 싣고 들어만 가면, 세속과 멀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침내 화엄사(華嚴寺)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데가 없었다.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가 다투듯 빼어나고 다투듯 흘러내리며, 대울타리 초가집이 복사꽃에 보일 듯 말 듯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이른바 청학동은 어딘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겨 놓았다."
또한 한시 「청학동(靑鶴洞)」은 다음과 같다. "두류산형모운저(頭流山逈暮雲低)[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 낮게 깔려]/ 만학천암사회계(萬壑千岩似會稽)[천만 봉우리와 골짜기 회계산과 흡사하네]/ 책장욕심청학동(策杖欲尋靑鶴洞)[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을 찾아가려 하니]/ 격림공청백원제(隔林空聽白猿啼)[저편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표묘삼산원(樓臺縹緲三山遠)[누대는 가물가물 삼신산은 저 멀리 보이고]/ 태선미망사자제(苔蘚微茫四字題)[이끼 낀 바위에는 ‘쌍계석문’ 넉 자 희미하네]/ 시문선원하처시(試問仙源何處是)[시험 삼아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딘가]/ 낙화류수사인미(落花流水使人迷)[꽃잎 떠내려 오는 시내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이인로의 청학동에 대한 작품은 후대의 많은 문인들로 하여금 지리산 청학동을 찾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송광연(宋光淵), 유몽인(柳夢寅) 등 조선 시대의 여러 문인들이 이인로의 기록과 자취를 근거로 지리산을 유람한 기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