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62 |
---|---|
한자 | 靑鶴洞記-李仁老- |
영어의미역 | Record of Cheonghakdong |
이칭/별칭 | 「이인로의 청학동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152년 |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220년 |
성격 | 한문학|유람 기록 |
작가 | 이인로(李仁老)[1152~1220] |
[정의]
고려 후기 쌍명재 이인로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찾지 못한 심경을 남긴 기록.
[개설]
「청학동기(靑鶴洞記)」는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파한집(破閑集)』 권1 14항에 전한다. 『파한집』은 시화(詩話), 일화, 기사 등으로 구성된 잡록집이다. 우리나라 시화집의 효시라 할 수 있으며, 우리 고전 시학의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파한집』에 수록된 이야기나 글은 각 항목이 별도의 소제목 없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청학동기」 또한 별도의 제목이 없는데, 이인로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를 본떠 「청학동기」라 속칭되고 있다.
이인로의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 왔다.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을 얻지 못하여 포의(布衣)로 자연을 벗하며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 임춘(林椿), 오세재(吳世才)[1133~?]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저술로 『파한집』이 전한다.
[구성]
산문과 운문이 섞여 있다.
[내용]
「청학동기」는 무신정변 등의 현실적 혼란에 염증을 느낀 이인로가 속세를 떠날 요량으로 집안의 형인 최당(崔讜)과 함께 무릉도원인 청학동을 찾아 하동의 화개동과 신흥동 일대를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 내용이 길지 않으니 전문을 실어 본다.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금나라 영내의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과 꽃받침처럼 잘 어우러진 봉우리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 천 리에 서리어 맺히었다. 이 산 주위에 10여 고을이나 있는데, 한 달 이상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노인들이 전하기를 “이 산속에 청학동이 있는데, 사람이 겨우 다닐 만큼 길이 매우 좁아서 겨우 통행할 만하다. 구부리고 기어서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마을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좋은 농토로 땅이 비옥하여 농사짓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그 동네를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등진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집터가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전에 나는 집안의 형 최상국(崔相國)과 함께 영원히 속세를 떠날 뜻이 있어서, 이 고을을 찾기로 약속하였다. 살림살이를 담은 대고리짝을 두세 마리 소에 싣고 들어만 가면, 세속과 멀어질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마침내 화엄사(華嚴寺)에서 출발하여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신흥사(神興寺)에서 묵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 아닌 데가 없었다. 천만 봉우리와 골짜기가 다투듯 빼어나고 다투듯 흘러내리며, 대울타리 초가집이 복사꽃에 보일 듯 말 듯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이른바 청학동은 어딘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지어 바위에 새겨 놓았다.
“두류산은 아득하고 저녁 구름은 낮게 깔려/ 천만 골짜기와 봉우리 회계산(會稽山) 같네/ 지팡이를 짚고서 청학동 찾아가니/ 숲 속에선 부질없이 원숭이 울음소리뿐/ 누대에선 삼신산(三神山)이 아득히 멀리 있고/ 이낀 낀 바위에는 네 글자가 희미하네/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 그 어디멘가/ 꽃잎 떠오는 개울에서 길을 잃고 헤매네”
예전에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선생집(五柳先生集)』을 뒤적이다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있기에 반복해 읽어 보았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대개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산과 물이 겹겹이 둘러쳐져 나무꾼도 갈 수 없는 깊숙하고 외진 곳을 찾아가 그곳에서 살았다. 진나라 태원 연간에 어떤 어부가 요행히 한 번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그 다음엔 길을 잃어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와 시로 전하였는데, 도원을 선계로 여겨 우거표륜(羽車飇輪)을 타고 다니며 장생불사하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도화원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니, 실은 저 청학동과 다름없는 곳이리라. 어찌하면 유자기(劉子驥) 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 그곳에 한번 가볼 수 있을까?
[의의와 평가]
하동군의 청학동과 관련한 기록은 조선 시대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청학동기」는 그 이전의 최초 기록이자 가장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동의 청학동이라 일컬어지는 화개동, 신흥동과 관련한 최초의 문자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 하동 쌍계사 일대로 들어오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며, 이인로 역시 청학동 유람록에서 최치원(崔致遠)[857~?]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선현 중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