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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307
한자 河敬復
영어음역 Ha Gyeongbok
이칭/별칭 양정공(襄靖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7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0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1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14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23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2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30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3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433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438년연표보기
묘소|단소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사당|배향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진양
대표 관직 경상도병마도절제사

[정의]

조선 전기 하동 출신의 무신.

[개설]

하경복(河敬復)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용모와 몸가짐이 아름다웠으며, 활쏘기에 능하였다. 조선 개국 초기 국가의 무비(武備)를 위하여 많은 공로를 세워 국가의 기틀을 견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가계]

본관은 진양(晉陽). 아우는 하경리(河慶履)이고, 아들은 하한(河漢), 손자는 하숙보(河叔溥)이다.

[활동사항]

하경복은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 부정을 지내고 상호군이 되었다. 1410년(태종 10) 중시에 급제한 뒤 첨지총제(僉知摠制)가 되었으며, 길주도조전지병마사(吉州道助戰知兵馬使)를 거쳐 경원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첨지총제가 되었고, 다음 해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가 되어 국경을 수비하였다. 1414년(태종 14) 동지총제에 올랐고, 1423년(세종 5) 함길도 절제사를 거쳐 1427년(세종 9)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1430년(세종 12)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 함길도 병마절제사를 겸임하였다.

1432년(세종 14) 판중추원사가 되어 한양에 올라올 때까지 15년간이나 북방의 국경지대를 수비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그의 졸기에 따르면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행하여 사졸들이 즐겨 그의 쓰임을 받았고, 야인들도 두려워하고 또 사랑해 받들었다. 진실로 의(義)가 아니면 비록 터럭 끝만한 것일지라도 결코 취하지 않아서 야인들이 더욱 그 청백함에 탄복하였으며, 국가에서 그에 의중(倚重)하기를 마치 장성(長城)같이 하였다.” 한다. 다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가 1438년(세종 20)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함길도에 있을 당시 부인 정씨(鄭氏)가 그의 녹봉을 밑천으로 하여 저택을 세우니, 하경복이 돌아와서 못마땅하게 여기며 “나는 평생토록 초가집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집을 이렇게 장대하게 세운단 말인가.” 하고 곧 그 철거를 명하였다. 그의 아들과 사위, 이웃들이 모두 헐지 말라고 간청한 뒤에야 비로소 중지한 바 있으니, 그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1433년 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계축진설(癸丑陣說)』을 편찬할 때 총재로 참여하였다. 이 책은 진도(陣圖)와 함께 주인(鑄印)으로 간행되어 군사 교육의 교재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하경복이 사망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고 조정에서는 조회를 정지하고 관청에서 그 장사를 돌봐 주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으로, 병사에 노고가 있음을 양(襄)이라 하고 덕으로 회유(懷柔)하여 대중을 편안하게 함을 정(靖)이라 이른다. 후손들이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경현사(景賢祠)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경현사에는 하경복 외에도 그의 아우 하경리, 아들 하한 및 손자 하숙보를 함께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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