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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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南時 |
영어음역 | Jeong Nams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31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현덕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9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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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6월 11일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추모 시기/일시 | 1994년 4월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313 |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
비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남시(鄭南時)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1885년(고종 22) 9월 19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던 정남시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궁항리 밭에서 대성통곡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누가 죽었기에 그리 통곡하는가?” 하고 물으니, “조선 천지가 모두 죽었다.”고 답하였다.
1919년 3월 28일 밤, 정남시는 권대섭(權大燮)과 궁항리를 돌며 만세 시위의 참여를 독려했고, 다음날 궁항리 주민 약 300여 명을 이끌고 월횡리를 경유하여 문암장터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이 발포하여 군중은 해산되고, 정남시와 권대섭은 체포되어 하동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해 4월 28일 정남시는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선고되었다. 법적 투쟁을 위해 6월 28일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과 옥중에서 얻은 병으로 수년간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요양하였다.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에 주남강습소[위태초등학교 전신]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32년 6월 11일 작고하였다.
[묘소]
묘소는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4년 4월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묘소 옆에 공적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