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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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愼萬重 |
영어음역 | Shin Manjung |
이칭/별칭 | 姜基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60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숙향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3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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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9년 6월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활동 시기/일시 | 1937년 |
몰년 시기/일시 | 1985년 11월 15일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604 |
묘소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관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신만중(愼萬重)은 1912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604번지에서 태어났다. 만 17세 되던 1929년 6월 김계영(金桂榮), 우용현(禹鎔鉉), 문태규(文泰奎), 김홍근(金洪根) 등이 1927년 8월 20일 발족시킨 하동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후 본격적으로 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전국적 조직인 신간회 하동지회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었는데, 조동호(趙東晧)·문태규·김기완·김계영·김대근·윤영근·김용호·이연찬 등이 몸담고 있었다. 1930년 5월 신간회 하동지회 임원이 개편될 때, 신만중은 달필을 인정받아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하동청년동맹과 신간회 하동 임원들이 주로 가담한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하동군지』에 의하면, 신만중은 부산 목도에서 동지인 김유태 등과 모임을 갖고 한국의 독립과 항일의 내용을 담은 전단을 제작하여 부산 시내에 살포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등사기를 이용해 전단지 600매를 제작, 살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신만중은 1년 넘게 미결로 가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1933년 5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부산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중 부산노동조합건설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또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7년 12월 2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치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1년 8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3년에는 부산교도소에 재수감되어 사상가 보호라는 명목으로 1945년 9월까지 갇혀 지냈다.
그의 말년 생활을 지키고 도와준 신상권(愼相權)[하동군 적량면 관리 22번지 거주]에 의하면, 신만중은 1945년 이후 일제의 고문 후유증과 옥독으로 인해 정신 착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와 같은 형편이었기 때문에 혼인을 생각해 볼 수도 없었고, 따라서 후손도 없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관리 동편 언덕에 있다가 2005년 11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86년 전 하동군수 김명규(金明奎)가 묘비를 세워 주었는데, 현충원으로 이장 후에도 묘비는 그대로 유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