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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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汶和 |
영어음역 | Park Mun Hwa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44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숙향 |
출생 시기/일시 | 1901년 1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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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7일 |
몰년 시기/일시 | 1950년 8월 16일 |
추모 시기/일시 | 1998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 944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하동 3·1운동의 효시는 1919년 3월 13일 하동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사건이다. 하동군 양보면 출신으로 양보일신학교 교사로 있던 정세기(鄭世基)[1984~1981]와 정성기(鄭成基), 정윤기(鄭潤基)의 주도로 시작된 이날의 시위는 군민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어 하동군 각지에 자극을 주었다.
그 해 5월에도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삐라 수십 장과 미농지 크기의 태극기에 ‘독립 만세’라 기입하여 적량면 동산리로부터 하동읍에 이르는 가로변 가로수에 붙여 대중들의 봉기를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한 5월 3일 하동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정에서 축구 시간을 이용해 교내 시위를 전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황급히 달려온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학생들이 일제히 이들에게 조롱과 욕설을 퍼붓고 그들의 교외 철수를 요구하고 더욱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활동 사항]
박문화(朴汶和)는 하동의 독립운동가 박치화(朴致和)의 친동생이다. 1901년 12월 1일 하동군 적량면 동산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인 박문화·염삼섭(廉三燮)·정점금(鄭点金)·전석순(全錫舜) 등 네 명은 비밀 회합을 열고, “우리 학생들도 궐기하여 의거를 결행하자.”, “학생이라고 보고만 있을 수 없다.” 하며 수차례 비밀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4월 4일 학생 기숙사에서 3~4학년 생도를 소집하고는, 5전에서 10전까지의 돈을 거출하여 그 돈으로 종이를 사서 구한국 태극기 30장을 제작하여 각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4월 7일 오전 11시경, 160여 명의 학생들은 선생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손에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구보 행진을 계속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하동읍 장터로 뛰쳐나왔다. 10~20세 정도 학생들의 시위에 장꾼과 많은 민중이 합세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니 그 함성이 좁은 장터에 메아리쳤다. 이때 긴급 출동한 경찰이 주동 학생을 검거, 체포하고 군중을 야만적으로 강압 해산시켰다. 박문화는 이때 체포되어 진주형무소로 끌려가 태 90도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과 패혈증으로 수년간 고생했다고 증언하는 이들이 많다. 1950년 8월 16일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박문화는 3·1 운동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8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2007년 5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부인 이경천과 함께 안장되었다. 현재 후손 등이 항일공적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추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