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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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弘權 |
영어음역 | Kim Hong Gown |
이칭/별칭 | 도경(道卿),하우(何尤),하우재(何尤齋)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1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숙향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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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1월 8일 |
추모 시기/일시 | 1963년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8월 15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15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상해임시정부 재무위원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용궁(龍宮). 자는 도경(道卿), 호는 하우(何尤)·하우재(何尤齋). 아버지는 김제응(金濟應)이고 어머니는 김내동(金內東)이다. 아들로 김병성(金炳成), 김병홍(金炳洪), 김병인(金炳仁)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홍권(金弘權)은 1892년(고종 29) 1월 25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15번지에서 태어났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전국 유일의 지방지였던 『경남일보』를 구독하며 항일 의식의 기반을 다졌다. 1908년 하동보통학교에 입학, 1909년 안희제(安熙濟), 윤병호(尹炳浩) 등 경상도의 지식 청년들이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결성한 대동청년당에 가입해 지하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경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하던 중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인 유경환(柳璟煥)을 만나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임시 정부의 하동군 대표로 참여하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재무위원이 되고, 1919년 4월 여운형·김철·윤현진·조완구 등을 만나 시국 문제를 논하였다. 그 해 5월 6일에는 제4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결에 따라 윤현진·조동진 등과 함께 경상도 지방의 구급 의연금(救急義捐金) 모집위원으로 선임되어 경상남도 지역 책임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0년부터 1936년까지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천석지기 전 재산을 다 바쳤다.
1920년 김홍권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 운동을 위해 조직된 하동청년동맹의 부장급 간부로 선출되어 하동 군민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하동청년회관 창립자 36인에 포함되어 활동했는데, 하동청년회관은 3·1 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민중 계몽과 독립 정신을 함양시키기 위한 향토의 민족 교양 강좌를 위해 1926년 설립되었다. 1937년 1월 8일 진주도립병원에서 37세로 사망하였다.
[묘소]
처음에는 양보면 진암마을 뒷산에 묘소가 있었는데, 2000년 10월 18일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05년 8월 15일 하동군 양보면의 유지들과 종친들이 김홍권의 고향인 운암리에 김홍권 공훈비를 세웠다. 2011년 진주보훈지청이 김홍권 공훈비를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물로 선정하여 철제 울타리와 긴 나무의자를 설치하고 무궁화 3백그루를 심고 돌사자를 양편에 세웠다. 해방 뒤 국회의원을 지낸 친우 김범부가 일제 강점기 때 세운 비가 300m 전방의 도로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