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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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主義運動 |
영어의미역 | Socialist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준형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하동군 등에서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위해 전개되었던 민족 운동.
[개설]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 중심의 사회 건설을 위한 계급 운동으로 출발하였지만, 식민지 민중에게는 민족 해방 운동으로서도 기능한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우리 사회에 사회주의 사상이 전래된 이후 민족 해방과 노동자 중심의 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 변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의 창립은 이를 위한 본격적인 출발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네 차례에 걸쳐 공산당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으며, 공산당 재건 사업도 어려워졌다.
1930년대 초반 신간회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와의 연합 노선을 버리고 노동 운동의 독자성을 강화하라는 9월 테제를 행동 강령으로 삼게 되었다. 이에 ‘고려공산청년회’나 ‘조선공산당’이란 당 조직적인 명칭을 버리고 노동자·농민 가운데에 들어가 혁명적 대중 조직 운동에 기초한 당 재건 운동에 보다 주력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각 지방의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중앙협의회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지방협의회의 주도하에 혁명적 노조 건설 운동이 전개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협의회 형태의 조직 방침으로 지역 내 다른 정파의 운동 세력을 일정하게 인정하고 제휴 연대를 모색하는 경향도 보였다. 격문 살포, 메이데이 투쟁, 각종 기념일 시위 투쟁 등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의식 교양과 선전 선동 사업에도 큰 역점을 두었다.
[부산·경상남도 지역 당 재건 운동과 하동 출신 공산주의자]
이 시기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당 재건 운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ML계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및 그 후신인 조선공산주의자재건협의회 산하 경남협의회의 활동이었다. 1930년 12월경 부산으로 잠입한 김시용(金時容)이 국제적색노동조합 조선협의회 부산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공장사’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공장사는 ‘노동자 교육 과정’,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의 임무’, ‘공장’ 등의 격문을 발간하여 각 공장 지대에 뿌렸다. 이들은 1931년 메이데이를 기하여 총파업을 계획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공장사와 관련된 하동 출신자들은 김태영(金台榮), 제영순(諸英順), 조복금(趙福今), 김계정(金桂正) 등이었다.
4월 하순의 1차 검거에서 무혐의로 석방된 김태영은 김시용의 조직을 재건하고 다시 활동하였다. 김태영은 6월 12일경 적색노조전국협의회 부산지방최고협의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이는 각 조합에 위원회를 두고 그 대표자들로 지방최고협의회를 조직하고 전국협의회에 연락시키며 나아가 전국협의회를 국제적색노동조합의 조선지부로 위치 지운다는 조직 구도를 상정한 것이었다. 출판부에서는 기관지로 『노동자』를 발간하여 조직원 및 노동자의 의식 교양에 힘썼다. 또한 새로이 쟁의부를 두고 산업 부문별로 책임자를 정했는데, 이는 산별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부문을 나눈 것이었다.
그러나 김태영은 검거되었고 이어 박용규·강갑영 등이 부산지방최고협의회를 재조직하기로 하고 활동했으나 9월 초 중촌 양말 공장의 동맹 파업을 계기로 검거되었다. 이후에도 하동 출신인 신만중(愼萬重)·우용현(禹容鉉) 등이 부산 지역에서 적색 노조 건설을 위해 계속 활동을 전개했으며 1932년 4월 초순에는 정식으로 부산적로건설협의회를 조직하고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처럼 경상남도 지역의 중심지였던 부산에서 하동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정진회 및 하동사회과학연구회]
하동 지역은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기반이 형성되고 있었다. 1925년 4월 말 하동에서는 청년운동·노농운동을 전개하던 일부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상 단체인 정진회(正進會)가 창립되면서 임시 의장에 김기완(金淇完), 임시 서기에 김계영(金桂榮)이 천거되었다. 정진회는 5월 12일 하동농민연합회관에서 제1회 역원회를 열고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의 참가를 결의하였다. 또 하동농민연합회, 하동농민회, 하동군 청년동맹에게도 참가를 권유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27년 8월경에는 하동사회과학연구회가 결성되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5일 하동 경찰이 해당 연구회 간부 김계영과 하동청년회 간부 하삼청(河三淸) 2명의 거주지에 들어가 수색하고 약간의 문서와 서적 등을 경찰서에 가져간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런 탄압 속에서 일부 인물이 부산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관련 모임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7월 여러 날에 걸쳐 하동 형사대가 한린식(韓麟植)·박홍종(朴泓鍾)·김기두(金琪斗)·최상석(崔相錫)·권영우(權永佑)·한문옥(韓文玉)·김태순(金兌淳)·최야물(崔也物)·윤영균(尹永均)·김점식(金点植) 등 하동의 여러 청년들을 검거하여 취조하고 부산에서 활동하던 신만중(慎萬重)을 잡아와 취조한 후 부산경찰서로 넘긴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같은 해 11월에도 하동 경찰은 최백근(崔百根)을 비롯한 하동 청년들을 검거하고 가택을 수색하여 서적·편지 등을 다수 압수하고 취조했다는 기사가 있다. 1933년 10월에는 우정(宇正)총독이 하동을 통과함에 따라 만일의 사태를 경계하기 위해 주의 인물인 윤영균·김진두(金珍斗)·김대근(金大根) 등과 기타 청년 다수를 검거하여 하동경찰서에 유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전라북도 지역 형사가 와서 전북 교원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박성무(朴性武), 김태순, 조복금 등을 검거하여 전라북도 임실경찰서로 압송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하동 지역에서는 사회주의를 통한 민족 해방 운동도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부산노동조합건설협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하동군 적량면 출신 신만중은 1990년 항일 운동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