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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866
한자 金南面大峙里鄭氏古宅
영어의미역 Geumnam-myeon Daechi-ri Jeong’s Old House
이칭/별칭 정씨 고택,정씨 고가,금남면 정부자집,대치리 진양 정씨 종가집,물헌 고택(勿軒 古宅)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5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화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15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658 지도보기
성격 전통 가옥|고택
정면 칸수 4.5[행랑채]|6[사랑채]|7칸[안채]
측면 칸수 1.5[행랑채]|2[사랑채]
소유자 정연주
관리자 정순태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전통 가옥.

[개설]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금남면의 부자 마을로 유명하다. 하동군 금남면대치리 마을에는 진양 정씨(晉陽鄭氏) 은열공파가 오랫동안 세거해 왔다. 진양 정씨의 이 마을 종가이자 규모가 가장 큰 대표적인 전통 가옥이 금남면 대치리 정씨 고택이다.

[위치]

하동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남해와 맞닿아 있는 금남면의 주산인 금오산(849.1m)을 뒤로하고, 동남쪽으로는 경관 좋은 남해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남해대교에서 지방도 1002호선을 따라 하동군 진교면 방향으로 약 4㎞ 가면 대치마을회관이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마을의 위쪽으로 약 300m 올라가면 길의 끝에 정면으로 솟을대문이 있는 넓은 행랑채가 보인다. 이 집이 바로 금남면 대치리 정씨 고택이다.

[변천]

금남면 대치리 정씨 고택은 대한 제국 시기인 1909년(순종 3)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5년에 완공하였다. 독립운동가이면서 백산(白山)의 심우(心友)였던 물헌(勿軒) 정재완(鄭在涴)이 건립하고 만석 거부를 누렸던 곳이다. 원래 대문채, 바깥사랑채, 사랑 행랑채, 중문채 겸 안사랑채, 안채, 좌우 아래채, 곳간, 가묘 등 많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해방 후 안채와 가묘, 곳간, 별당채 등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훼철되었다. 현재는 사랑 영역만이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안채 영역은 기단(基壇)만 남아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형태]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도 전체 주거의 일곽을 기와 담장으로 둘러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였는데, 후면 높은 경사지 위에도 설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남부 지방 상류 주택들이 대부분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적 불안을 경계의 명확성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부 영역에서 각 채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한 것은 조선 시대 사대부가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매우 위계가 높은 주거의 구성을 이루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문채는 동향인데, 6칸으로 가운데 솟을대문[효명문(孝明門)]을 두었다. 특히 기단과 담이 높아 사대부가의 당당한 위세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대문채 북측에 남향한 행랑채는 정면 4.5칸, 측면 1.5칸 규모의 툇집이다. 마루방이 없는 간소한 구성을 하였는데도 맞배지붕의 한식 기와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앞을 담으로 높이 막아 사랑 마당과 구분되는 독자의 영역성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이는 보통의 상류 주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구성이다.

사랑채는 동향으로 대문채와 나란히 배산임수(背山臨水)한 구성을 취하였다.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집으로, 높은 기단 위에 팔작지붕으로 당당한 위세를 드러내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기단은 일반적으로 구성하는 장대석(長臺石) 구성 기법을 넘는 판석 기법으로 전면 기단을 모두 구성함으로써 호사스러운 치장의 특성을 갖고 있다. 남쪽 끝의 전면에는 누마루인 공루를 두었고, 나머지 간은 전퇴(前退)를 두었다.

큰사랑과 대청은 각각 2칸×1.5칸의 규모로 구성되었다. 사랑방은 원래 4칸으로 나누어져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미서기문들이 없이 통간(通間)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청 쪽으로의 문은 책방과 함께 열어들개 4분합문으로 구성되어, 여름에 개방적으로 사용함과 동시에 종가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융통성을 볼 수 있다. 사랑채 북쪽 끝의 책방은 전후 2칸인데, 공간을 구분함으로써 쓰임을 편리하게 하였다.

전면의 기둥은 모두 원주(圓柱)를 사용하였고, 소로수장 한 주두집의 구성에 굴도리를 두었는데 일반 민간의 집으로는 가장 화려한 구성이다. 지붕 가구의 구성은 무고주 5량에 판대공을 두고, 대청의 가운데 대공만 원방형의 대공을 두었다. 상량에 “공자탄강 이천사백육십오년 갑인사월초육일 입주상량(孔子誕降二千四百六十五年甲寅四月初六日立柱上樑)”이라 적혀 있어 유가(儒家)임을 나타내고 있다. “공자탄강 이천사백육십오년”은 1914년을 말한다.

사랑채 뒤편으로 중문간(中門間)이 있는 행랑채가 있는데, 이 남쪽에 ‘ㄱ’자형으로 구성된 안사랑채가 있다. 남부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성 형식으로 정씨 고가 집안의 건축 안목이 높음을 보여 주는 요소이다. 즉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 지방에서는 일반적이지만, 남부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구성을 도입함으로써 정씨 고가가 하동 지역에서의 토착적 건축이 아니라 중앙과의 교통이 많은 우월한 건축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남부 지역 목수가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꽤 이름 있는 목수를 동원한 수준 있는 작품임을 알려 주는 요소가 된다.

안사랑채의 전면으로는 누마루를 두었는데, 전면의 사랑채와 시선이 교차됨이 없이 먼 조망을 확보할 수 있는 적절한 위치에 구성되어 있다. 안사랑방은 2칸으로, 전면으로 향하고 있다. 안채로의 출입은 제한적으로 구성되도록 원래 남쪽 아래채와 담으로 영역 지어 구분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그 담의 흔적만 남아 있다.

안채 영역은 가운데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남부 지방의 일반적인 구성인 튼 ‘ㅁ’자형의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와 남쪽 편의 아래채는 훼철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북측의 아래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정면 7칸의 겹집으로 전해지며, 기단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사랑채와 같은 기법의 기단이 구성되어 있고, 이는 안사랑채의 남쪽 일부도 동일하다. 북쪽의 아래채는 디딜방앗간, 정지, 방 2칸으로 구성된 반 겹집으로, 마루의 깊이를 다르게 구성하여 공간의 활용성을 높인 근대적 건축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집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정씨 고가의 소유자는 정연주이며, 관리자는 정순태이다. 대문체와 사랑채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안채가 철거되어 아쉬움이 크다.

[의의와 평가]

금남면 대치리 정씨 고택은 전반적으로 가구 규모가 크며 높게 구성되어 있고, 각 영역 간의 구분이 명확하다. 안채가 훼손되지만 않았더라면, 근대적 한옥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영남의 대표적 가옥으로 자리하여도 손색없는 전통 상류 주거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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