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58 |
---|---|
한자 | 花開部曲 |
영어의미역 | Hwagae-bugok Local District |
이칭/별칭 | 합포(陜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해영 |
제정 시기/일시 | 고려시대 |
---|---|
폐지 시기/일시 | 조선 중종 이전 |
관할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일대 |
[정의]
조선 전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일대에 설치된 특수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부곡은 원래 전쟁 포로의 집단적 수용지이거나, 본래 군·현이었다고 하더라도 반역이나 적에 투항하는 등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군현의 격이 떨어져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생 촌락처럼 지리적 조건이나 사회·경제적 여건이 열악하여 특수한 행정 구역으로 편성된 곳이기도 하다. 부곡은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전국적으로 널리 존재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특수 행정 구역이 일반 군현으로 폐합되는 과정에서 거의 소멸하였다. 다만 화개부곡과 같이 조선 초기까지도 부곡리(部曲吏)가 지역 내 행정을 담당하던 경우도 일부 있었다.
[관련 기록]
화개부곡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진주목조에 “진주목에는 화개(花開)와 살천(薩川) 두 부곡이 있다”라는 내용인데, 그 세주(細註)에 “그 우두머리는 모두 머리를 깎아 승수(僧首)라고 칭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주도 진주목관조에는 “곡사(谷司)가 둘인데 화개와 시천(矢川)이다. 이들 두 사는 그 장리(長吏)가 삭발을 하여 승수라 불리었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진주목에는 화개·살천 두 부곡에 대하여 “이 두 부곡의 장(長)은 모두 머리를 깎아서 승수라고 일컬었는데, 방언(方言)의 소리가 변하여 지금은 시내(矢乃)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목 속현조에는 “합포(陜浦)라 하기도 하며 주 서쪽 1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으며 승수라 부른다”라고 하여 화개를 ‘합포’로 달리 부르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조선 성종조까지 화개부곡에 관한 기록인데, 이로써 화개는 성종조까지 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존치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주목 속현 신증(新增)조에는 “정덕 무인년(1518, 중종 13)에 악양현과 화개현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의 출납에 노고가 많다고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화개부곡은 중종조 이전에 화개현으로 불리었던 사실 또한 확인된다.
[변천]
오늘날 하동군 화개면 일대는 신라 시대 혹은 고려 시대 이래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부곡이라는 특수한 행정상의 구역으로 오랫동안 진주목의 관할을 받은 지역이었다. 이렇게 특수한 행정상의 구역으로 존치되었던 화개부곡은 성종조와 중종조 사이의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야 일반 행정 구역으로 변모되었으나 여전히 속읍의 형태로 진주목의 관할에 있었다. 이후 화개현은 진주목의 직촌(直村)이 되었다가, 하동현이 1704년(숙종 30) 도호부로 되면서 관할 영역이 확대되어 종래 진주목에 속하였던 악양·화개·진답·적량의 네 개 면이 하동도호부로 이속될 때 비로소 하동에 속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부곡은 신라 시대 이래 고려 왕조에 이르기까지 특수한 행정상의 구역으로 널리 존재하였으나,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일반 행정 구역으로 재편되어 소멸되기에 이른다. 화개부곡의 경우는 성종조까지 여전히 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이렇듯 오랫동안 특수 행정 구역으로 존치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이다. 특히 화개부곡에 관해서 “그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아 승수라고 부른다”라는 기록 또한 화개·살천 두 부곡에 대해서만 이러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