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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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岳陽縣 |
영어의미역 | Akyang-heon Administrative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해영 |
[정의]
757년부터 1702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 시대의 주·군·현은 각각의 영역에 속한 여러 촌락을 직접 지배하는 한편, 주·군과 현 사이에는 영속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악양현(岳陽縣)은 신라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하나의 독자적인 지방 행정상의 단위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하급의 지방관인 소수(少守)나 현령이 이를 다스렸다.
[관련 기록]
악양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 하동군조에 “[하동군]은 관할하는 현이 세 곳인데 …… 악양현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을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악양현]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진주목의 속현으로 나타나며, “본래 신라 소다사현이다.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하동군의 영현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진주목]에 내속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목 속현조에는 “악양현은 주 서쪽 1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으로 경덕왕이 지금의 명칭[악양]으로 고쳐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 [진주목]에 내속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책 신증(新增)조에는 “정덕 무인년[1518, 중종 13]에 악양현과 화개현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 출납에 노고가 많다고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라고 하였고, 같은 책 비고(備考) 고읍(古邑)조에는 “본조 중종 13년에 의창을 두었고, 숙종 28년[1702] 하동에 소속되었다”라고 하였다.
[내용]
악양현과 같이 타 읍의 속현이던 고을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고 향리가 고을 행정을 담당하면서 주읍(主邑) 수령의 관할을 받았다. 이와 같이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주읍의 관할을 받는 속현은 고려 시대에 전국적으로 널리 존재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 종래 속현이었던 곳에 감무(監務)라는 최하급의 지방관을 파견하는 지역이 점차 늘어났다. 악양현의 경우 감무의 파견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진주목의 속읍으로 존속하다가 하동군에 이속되면서 폐읍되어 하동군의 한 방면으로 남게 되었다.
[변천]
악양현은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전국에 걸쳐 지방 군현의 명칭을 개정하면서 악양현으로 이름이 고쳐져 하동군에서 관령하는 고을로 자리 잡았다. 현종 때 진주목에 내속된 이래 조선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진주의 속읍이었다. 중종 때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 출납에 노고가 많다고 하여 여기에다 의창을 두었고, 1702년(숙종 28) 하동에 소속되면서 폐읍되어 하동의 한 방면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악양현은 신라 시대 이래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행정상 독자적인 구역으로 존재하였으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하여 향리가 고을 행정을 담당하면서 주읍인 진주목의 관할을 받았다. 이처럼 주읍의 관할을 받는 속읍은 지역 발전에 불리하였고, 이후 군현의 개편 과정에서 하동군에 이속되면서 폐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