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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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邑縣 |
영어의미역 | Haeup-heon Administrative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757년부터 고려 전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757년(경덕왕 16) 한화 정책(漢化政策)에 의해서 포촌현(浦村縣)이 하읍현(河邑縣)으로 개명되었다. 이러한 개명은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관련 기록]
하읍현의 관련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4 잡지(雜志) 권3 하동군조(河東郡條)에 “본래 한다사군이었는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영현이 셋인데, 성량현(省良縣)은 지금 금양부곡(金良部曲)이며, 악양현(岳陽縣)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악양(岳陽)으로 쓰고 있으며, 하읍현은 본래 포촌현으로 경덕왕이 하읍으로 개명하였는데 지금은 미상이다”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곤양군(昆陽郡) 건치연혁조에 “본래 고구려 곤명현(昆明縣)이며, 신라 때 칭호는 자세하지 않다. 고려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고, 본조 세종 원년에 군 북쪽 소곡산(所谷山)에다가 어태(御胎)를 안치하고, 남해군(南海郡)을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19년에 다시 갈라서 남해현을 설치하고, 진주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적조(古蹟條)에 “옛 곤명현은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지금 곤명리(昆明里)로 되어 있다. 하읍폐현(河邑廢縣)은 본래 포촌현이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본조에서 이 고을에 이속시켰다”라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곤양군 건치연혁조에 “곤양군은 본래 신라의 포촌인데, 757년에 하읍이라 고쳐 하동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태조 23) 곤명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진주에 내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 1419년(세종 1) 어태를 안치함으로써 남해현을 합쳐서 곤남군으로 높였다가 1437년(세종 19) 다시 갈라서 남해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 곤양군으로 고쳤다. 옛 치소는 지금 치소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곤명리라고 칭한다”라고 하였다.
[내용]
하읍현은 본래 포촌현으로 경덕왕이 하읍으로 개명하였으며, 하동군의 영현 셋 가운데 하나였다. 하읍현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곤남군의 고적조에 “옛 곤명현은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며, 지금 곤명리로 되어 있다. 하읍폐현은 본래 포촌현이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하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본조에서 이 고을[곤남군]에 이속시켰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하읍현의 치소는 현재의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일대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천]
하읍현은 원래 포촌현이었는데, 757년 한화 정책에 의해서 하읍현으로 바뀌면서 하동군의 영현이 되었다. 하읍현이 언제 폐현이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그 위치를 미상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 초에 폐지되었던 것 같다.
[의의와 평가]
하읍현은 고려 초에 이미 폐현이 되면서 지명조차 바뀐 것으로 보인다. 여러 관련 기록을 검토하여 보면 하읍현은 오늘날 사천시 곤명면 면 소재지 일대가 하읍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하읍현은 신라 시대 당시에 현을 이루고, 포촌현이라는 고유한 지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하동군의 유구한 역사성을 보여 주는 옛 행정 구역으로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