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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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 |
영어의미역 | Dutiful S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최현규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 출신이거나 광명에 연고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한 자녀.
[개설]
『논어(論語)』의 학이 편에는 “효와 제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여 효가 동양의 무상지고한 윤리였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효는 삼국시대에 이미 고구려의 태학(太學), 신라의 국학(國學) 등의 교육 기관을 통해 충과 함께 교육되었다. 삼국 간 전쟁이 계속되면서 충이 사회 윤리로 강조되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함께 가족 윤리로서 효도가 장려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완전히 정착됨에 따라 효는 정치적·사회적 관념으로 완전히 체계화되었다.
조선 왕조 건국의 주체 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은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이룩하고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새 왕조의 사회 체제를 가부장적 윤리 중심으로 확립해 나가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즉, 성리학에 입각한 엄격한 신분 제도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성리학적 신분 계층론은 상하(上下)·존비(尊卑)·귀천(貴賤)의 구별을 기본 특징으로 하며, 구체적인 윤리 덕목으로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들고 있다. 이러한 윤리관에 따라 신하보다 왕을 높여 국가 질서를, 자식보다 부모를 높이고 아내보다 남편을 높여 가정 질서를, 어린이보다 어른을 높여 사회 질서를 확립하여 결국에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에 따라 각 군주들은 효자와 열녀에 대한 포상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특히 태조(太祖) 대에는 늙은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의 말씀에 잘 순종했다는 것만으로도 포상을 함으로써 효행을 널리 확산시키고자 했다. 또 세종(世宗) 대에는 『효행록(孝行錄)』 등의 각종 윤리 서적을 간행하여 효제(孝悌)의 풍속을 두텁게 했다. 특히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그림으로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서 글을 알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윤리 이념을 보급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또한 성종(成宗) 대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발간하면서 이전의 지리서와는 달리 효자·열녀 조(條)를 신설하고 이들에 대한 추천과 포상을 실시하여 삼강오륜의 윤리를 정착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조선시대 효자들의 일반적인 삶은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밤새 부모의 안부를 묻고, 길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는 반드시 얼굴을 보고 이를 아뢰었으며, 명절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부모가 병들면 대신 아프기를 기도하며 온갖 약을 구했고, 때로는 상처를 입으로 빨거나 변의 맛을 보아 병의 정도를 짐작했으며,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병을 고치려 노력하였다. 또한 부모가 죽으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여막을 지어 3년간 시묘에 들어갔다.
조선시대 효자와 열녀를 선발하는 기준은 대체로 지방에서 소문이 나면 고을의 관리가 감사에게, 감사는 예조에, 예조는 국왕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아 포상을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포상에 있어 태조 대에서는 쌀과 베 등의 물품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태종 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정문(旌門)을 세우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에는 일반 백성들이 교육을 받기 어려운 시대였던 관계로 눈으로 직접 보고 교화를 받도록 하기 위해 정문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성리학은 요(遼)·금(金)과 대결하고 있던 송대(宋代)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립된 사상이다. 정치적으로는 군신 간의 도덕의 강화를 지지하고, 사회적으로는 엄격한 신분 계층 제도를 옹호하고 있다. 즉,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정절을 다하는 것이 하늘에 근본을 둔 법칙이고, 자식과 아내로서 예를 행함은 땅의 도리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효와 열을 통한 가족 윤리의 확립과, 나아가서 전제 군주 체제의 옹호를 통한 사회 질서와 통치 질서의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부터 효자와 열녀들을 발굴하여 이들에게 줄기차게 포상을 하며 장려했던 것이다.
왕조 사회에서 가정에서의 효도는 국가의 왕에게 충성하는 데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국왕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지배 이념으로 보아서 적극 장려되었다. 반대로 불효하거나 역적이 나올 경우에는 유교의 강상(綱常)을 범한 죄과로 간주되어, 그 집안이나 마을, 또는 고을 전체가 처벌을 받고, 고을의 지위까지 격하되어 주민들은 약 10년간 막대한 부역 등을 부담하는 등 고생을 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의 효, 또는 효도는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사망한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조선시대의 문화 전통은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효자를 낳았고, 그들의 지극한 효심은 학자들의 문집에 담기거나 효자비의 비문에 실려서 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덕행의 표준이 되어 왔다.
[광명의 효자]
송수회(宋秀誨)는 시대 미상의 인물로 천성이 순효(純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아비의 변을 맛보며 병을 가늠했고, 어머니가 병이 들었을 때는 부스럼을 빨았다고 한다.
정동만(鄭東晩)[1753년~1822년]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우고(右古), 호는 졸암(拙庵)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고 하여 ‘정효자(鄭孝子)’로 불렸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