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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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仁復 |
영어음역 | Yi Inbok |
이칭/별칭 | 내초(來初),춘절재(春節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내초(來初), 호는 춘절재(春節齋). 명재상 이원익(李元翼)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주목사를 지낸 이증현(李曾賢)이고,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이존도(李存道)이다. 어머니는 권석(權碩)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인복(李仁復)[1683~1730]은 1705년(숙종 31)에 진사가 된 뒤 문음으로 입사(入仕)하여 1708년 하양현감이 되었으며, 그 뒤 경상도도사로 재직 중 1714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16년 홍문록(弘文錄)·도당록(都堂錄)에 차례로 뽑히고, 1717년 비변사로부터 어사(御史)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인물로 뽑혔으며, 그해에 부수찬이 되었다. 1718년 수찬이 되고, 1721년(경종 1)에는 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3년(경종 3) 9월 안동부사에서 물러난 후 병을 핑계로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에 칩거를 하였다. 이때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과 함께 태백산과 부석사를 유람하며 시를 남겼다. 1724년에 동부승지·사직이 되었다. 이 때 경종이 죽자 왕대비의 복제(服制)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는데, 이인복은 3년 참최(斬衰)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1727년(영조 3) 공조참의에 이어서 예방승지를 거쳐 1729년 병조참판에 올랐다.
이인복은 남인계의 신진 지식인으로 허목(許穆)을 영수로 하는 문외파(門外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또한 오광운(吳光運), 강박(姜樸), 강필신(姜必愼), 이중환(李重煥) 등과 백련시사(白蓮詩社)를 결성하였다. 청백리 이원익의 후손으로 검소함을 즐겼는데, 안동부사 시절 지방관의 모임 행사에 참석하였으나 행색이 초라하여 주변 사람이 이유를 묻자 “3대에 걸쳐 입어 본 일이 없는 가죽 옷을 어떻게 입느냐”면서 오히려 반문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사상]
이인복과 백련시사 동인의 산수애호(山水愛好) 사상은 자연이란 단순하게 벗 삼아 즐기는 여가와 흥취의 장소가 아니라 선비들이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 대상’으로 몸과 마음을 의탁하는 믿음의 대상이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이러한 내면에는 진정한 선비의 몸가짐이란 마음은 세속에 있으며 몸을 즐기는 산수가 아닌 몸과 마음 모두 세속과 거리를 두는, 또는 몸은 세속에 있어도 마음만은 세속을 벗어나는 자연관(自然觀)의 세계를 잘 보여 준다.
[저술 및 작품]
시와 제문 등이 남아 있으며 6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현재 2권만 전한다.
[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