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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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明地域-外勢抵抗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윤모 |
[개설]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흥군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은 경부선과 경의선 두 철도 건설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1901년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된 이래 역부의 저렴한 임금과 철도 부지의 무상 수용에 저항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01년 9월 7일자 『황성신문』에는 경부선 철도의 기공식 이후 시흥 등 지역에서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역부(役夫)들이 적은 임금에 불만을 갖고 소요를 일으켰으며, 땅 주인들은 적절한 지가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저항 운동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
1904년 2월 10일,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일본과 러시아는 제국주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이미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1902년 1월 30일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어 일본군은 2월 9일 대한제국의 수도인 한성을 침략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고, 2월 23일에는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하였다. 이는 일본군이 작전에 필요로 하는 대한제국의 모든 지역을 강압적으로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일본군의 전개와 작전에 필요한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제국 관리들을 강압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1904년 1월 21일 중립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으나 제국주의 시대에 허약한 대한제국 편을 들어 줄 그 어떤 나라도 없었다. 한반도와 함께 전쟁 무대가 된 만주의 주인인 청나라 역시 2월 12일 중립을 선언했지만 일본과 러시아 군대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일본군은 아무런 국제적인 제재를 받지 않고, 4월 3일 대한제국 영토 내에 이른바 조선군주차사령부(朝鮮軍駐箚司令部)를 설치했다. 이로써 한반도 전체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한 일본군의 작전 지역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불법적으로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킨 강도 일본은 6월 6일에는 개척을 명목으로 한반도 전역에 대한 이른바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였다. 송수만과 심상진 등이 주동이 되어 결성한 애국 단체인 ‘보안회(保安會)’를 중심으로 한성 종로에서 성토대회를 갖는 등 전 국민적인 반대에 막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강도적인 행위는 끊임없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였다.
이 와중에도 일제의 주구(走狗)인 이용구 등은 이른바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했고, 송병준과 윤시병 등 매국노들은 유신회(維新會)[얼마 안 있어 일진회(一進會)로 개칭함]라는 단체를 조직해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매진하였다. 이들은 12월 4일에는 오로지 부일(附日)만이 살길이라 하여 하나로 통합했으며, 이후 철저한 일제의 주구로서 그들의 주인인 강도 일본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한반도의 중요한 지역 곳곳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제는, 1904년 8월 21일에 이른바 제1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을 강요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주요 직책에 대해 외국인 고문을 두는 이른바 고문 정치를 감행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행정 및 재정, 군사와 사법에 대한 통제력은 일본인 혹은 일본의 이익에 매진하는 외국인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전쟁의 경과를 보더라도, 1904년 4월 25일 러시아의 극동 함대[블라디보스토크 함대]가 대한제국 영해인 원산만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송선을 격침시킨 것 이외에는 육군과 해전에서 모두 일본군의 승세가 완연하였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宣戰)을 포고한 것은 2월 10일이었지만, 이보다 앞선 2월 8일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침시켰다. 이어 일본군은 거침없이 만주로 진격하여 9월 4일에는 만주의 요충지인 요양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5월 27일에는 울릉도와 독도 바다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여 해전에서도 승세를 굳혔다.
이처럼 1904년 한 해 동안 조선왕조 500년을 이은 대한제국은,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군사적 침탈과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협약들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통치권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도 1904년에 이어 1905년에는 국제적으로도 철저하게 고립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먼저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대한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 지배권을 그들 마음대로 인정하였다. 또한 8월 12일에는 영국이 제2차 영·일 동맹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우선권을 인정하였다. 9월 5일에는 포츠머스 강화조약 체결로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한반도와 만주, 필리핀 지역 등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땅따먹기 대회가 끝난 것이다.
[대규모 토목 공사가 빚어 낸 갈등]
러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대한제국을 침탈한 강도 일본은 군사적·행정적으로 한반도를 장악하였다. 경의선과 경부선의 착공 역시 러일전쟁과 만주 침략을 위한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은 이미 1903년 12월 30일 내각회의를 통해 장차 러시아와의 협상이 결렬되었을 때 일본이 실행해야 할 ‘대청한방침(對淸韓方針)’이라는 것을 정하여, “보호적 조약을 체결할 수 있으면 가장 유리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강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통해 일본은 그들이 정한 가장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면 대한제국은 강도 일본의 철저하고 치밀한 각본에 의해 독립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
특히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는 한반도 전체를 일본군의 군사 작전 범위에 포함시키는 엄중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많은 병력이 한반도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서 조선군주차사령부까지 설치된 마당에 이제 일본군을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은 대한제국 안에 없었다. 강도 일본은 그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일의정서에서 규정한 내용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노골적인 침략과 수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광대한 대한제국의 토지와 통신망 그리고 주요 철도 시설 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게다가 군사 작전의 개념에 입각해서 대한제국의 기간망을 군용으로 점령하거나 접수하여 시설하였다.
경의선 철도는 바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라는 명확한 개념 하에 진행된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도 일본은 한성과 의주 사이 군용도로 건설까지 대한제국 정부의 예산으로 시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근대 문명 성립에 중요한 전제가 되는 철도 건설이 한반도와 대한제국에서는 강도 일본이 자행한 침략의 상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901년 9월에 기공된 경부선 철도는, 1903년 12월 5일 영등포와 수원을 잇는 구간이 준공되었다. 그리고 한성[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철도의 전 구간이 완공된 것은 1904년 11월 10일이었다. 이어 1905년 4월 28일에는 경의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흥군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은 바로 경부선과 경의선 두 철도 건설 과정에서 촉발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이미 1901년 경부선 철도 기공식 이후 시흥 등 지역에서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역부(役夫)들이 적은 임금에 불만을 갖고 소요를 일으켰으며, 땅 주인들은 적절한 지가 보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다. 비록 대한제국 정부가 병력을 파견하고 순검[경찰]을 보내 무력으로 위협하여 이러한 분위기는 한 번으로 그치기는 했지만, 철도 부설을 둘러싼 철도 연변 주민들의 동요를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강제된 군용 역부 징발의 문제들]
철도 건설을 둘러싸고 광명 지역을 포함한 시흥군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은 1904년 9월 15일 폭발하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미 이 지역 주민들은 낮은 임금과 거의 무상에 가까운 토지 수용 그리고 강압적인 노동력 동원으로 철도 건설 자체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때에 일본 공사는 물론이고 이른바 일본군주차사령관까지 나서서 1904년 7월부터, 러일전쟁과 장차 만주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와 철도 건설을 명목으로 경기·충청·전라·경상 등 지역에서 군용 역부 징발을 대한제국에 강요하고 나섰다.
당시 침략자들이 요구한 인원은 무려 1만 명에 달하였다. 정부가 일본군의 요구에서 2,000명을 뺀 8,000명만 모집하라는 지시를 각도 관찰부에 내린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정도였다. 강도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노동력 수탈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일본군의 강압과 협박과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의 동조로 대한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하였다. 이때 시흥 지역에 배당된 인원은 대략 80명이었다. 시흥군에서는 산하 각 면(面)의 집강(執綱)들을 소집해 인력 동원에 협조할 것을 강력하게 지시하였다. 그러나 각 면의 집강들은 광명 지역을 포함한 군민 수천 명을 모아 시흥군 관아에 집결시키고는, 강제로 역부 동원령을 내린 경기도관찰부의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01년의 전례가 있어 군민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시흥군수 박우양(朴隅陽)은 경기도관찰부에 가서 시흥 지역의 동원 역부 수를 30명으로 감해 받았다. 그리고 집강들을 불러들여 각 동(洞)마다 역부 1명씩을 차출하라고 지시하였다.
여기서의 문제는 역부 동원에 따르는 지역 주민들의 피해에 대해 정부[혹은 경기도관찰부]의 인식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비록 일제의 압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동원되는 지역민들의 고충에 대해서 대한제국 정부가 그 어떤 고민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라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광명 지역에서 동원된 역부가 지역을 떠나 철도 건설 현장에 가서 일을 할 때 드는 임금이나 관련 비용은 해당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부담해야 했다. 왜냐하면 강제 징집을 강요한 일본 정부나 일본군 사령부 혹은 시행 주체인 대한제국 정부는 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징발된 역부들의 처우를 보면, 두 끼 내지 세 끼 식사와 담배를 제공받을 경우 일당 6~20전, 식사 등을 제공받지 않으면 40~50전 정도였다. 그런데 이 모든 경비는 역부를 동원한 주체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일본이 징발했으면 일본이 부담했고, 대한제국 정부가 모집했으면 대한제국 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인 것이다.
1904년의 경우에는 명목상 대한제국 정부가 역부들을 모집했으므로 소요 경비는 정부가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정부는 예산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경비가 징발된 지역민들의 몫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물가 상승과 교통비 등의 명목으로 이때는 1901년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되었다. 그리하여 징발된 역부 1인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많으면 3천 수백 냥, 아무리 적어도 1,500냥의 돈이 들어갔다. 품삯과 일하는 기간에 따라 머무르는 비용만 그렇다는 것이다. 빈곤한 농민과 그 농민들이 사는 마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특히 광명을 비롯한 시흥 지역에서는 경비와 관련된 여러 소문들이 횡행하였다. 군수가 역부를 모집할 때 수십만 냥을 수뢰했다거나, 일본인으로부터 종이돈 몇 백 원을 받았다든가, 또 시흥군의 어떤 서기(書記)가 역부 1인당 식비 명목으로 12냥 5전씩 지급된 것을 빼돌렸다는 등의 루머가 무성하였다. 그리하여 관아와 관찰부, 정부에 대하 지역민들의 불신과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또 생겼다.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는 일본으로서는 만주를 장악하고 병참 기지 건설을 위한 철도 공사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더욱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진 것이다. 일본군은 대한제국 정부에 추가로 많은 역부를 요구하였다. 이에 정부[담당 부서는 내부(內部)]에서는 각 지역에 일본군이 요구하는 인원을 배분하여 추가 징집을 지시했으나, 이번에는 광명 등 서울과 인접한 지역에 집중되었다. 시흥군수는 각 지역의 집강들에게 추가로 21명의 역부를 징집하라고 지시하였다. 집강들은 누구보다도 농민과 마을 사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도저히 역부들을 징발할 수 없었던 집강들은 일시적으로 몸을 피하거나 칩거에 들어갔다.
상부[관찰부]의 독촉이 심해지자 군수와 관리[아전]들이 직접 나셨지만, 이에 응하는 농민은 없었다. 군에서 강제 징집을 시도하자 농민들은 집을 떠나 산속으로 피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떠나 버렸다. 한창 농번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농번기가 닥치면 송사(訟事)도 미룰 정도도 농민들의 노동권을 보장해 주었으나, 대한제국 시기에는 농번기에 다른 지역으로 다른 일을 위해서 농민들을 동원하려 한 것이다. 그것도 한반도 침략을 목적으로 하는 일본군의 강압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제2차 시흥 민요(民擾)가 일어나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집강들을 중심으로 회합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서 중요한 결정이 세워졌다. 첫째, 농민들을 포함한 주민들이 향회(鄕會)를 열어 역부 징발 철회를 요구할 것과, 둘째,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901년 때와 같이 집단적 행동으로 요구를 관철할 것, 셋째 역부들의 강제 징집으로 인한 여러 문제들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릴 것 등이었다. 이 중에서 언론을 활용한다는 계획은 광명을 포함한 시흥 지역에서 처음 보이는 새로운 민원 해결 방법으로 주목되었다. 이 역할은 전직 관리인 김원록(金元祿)이 맡았다.
김원록은 주사(主事)를 역임한 바 있는 남중희(南重熙)와 협의하여 투고할 원고를 작성하고, 이기춘(李奇春)에게 『황성신문』에 전하도록 하였다. 이기춘은 급히 강경으로 내려갈 일이 생겨 노량진에서 시흥 읍내에 살던 이명수(李明秀)에게 이 원고를 대신 신문사에 전달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신문에 투고하여 역부 징집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계획이었으나, 결국 이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최종적으로 원고를 전해 받은 이명수가 관아에 신고를 한 것이다. 원고를 뜯어 본 이명수는 역부 징발과 관련된 시흥군의 비리를 폭로한 내용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관아에 밀고했고, 9월 10일에 김원록이 순검청(巡檢廳)에 체포·수감되었다. 이어 남중희도 경무청(警務廳)에 투옥되었다. 원래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9월 13일 광명과 시흥 지역 집강들이 모여 각 지역에 통문(通文)을 발송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천교는 지금의 광명시로 들어가는 안양천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이튿날인 9월 14일, 일직리[현 광명시 소하동 지역]에 거주하는 민용훈(閔用勳)의 주도로 시흥군내의 각 지역에 사발통문을 발송하였다.[민용훈은 전직 주사로 경기 지역의 사족(士族) 출신이었다]
민용훈이 보낸 사발통문에는 역부들의 강제 징집 때 군수와 이서배(吏胥輩)들이 저지른 불법과 부정행위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성토하기 위한 집회를 9월 15일 오전 한천교에서 개최하니 모두 참석하라는 안내문과 함께, 불참하는 지역이나 집이 있으면 모두 징벌을 가하겠다는 협박문도 첨부되어 있었다. 이때 사발통문이 전달된 곳은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그리고 서울의 관악구·영등포구·구로구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모두 43개 구역이었다. 특히 광명 지역의 경우는 광명리와 일직리, 자경리, 철산리, 노화대리, 아방리, 노온곳리, 노온사리, 가리대리 등 대부분이 포함되었다.
사발통문을 받은 각 동의 집강은 집집마다 1명을 차출하거나 동리 대표 및 주민들을 인솔하고 한천교 집회에 참석하였다. 이때가 오전 11시쯤이었으며, 모인 군중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광명 한천교 봉기, 곧 제2차 시흥민요(始興民擾)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봉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김원록과 농민 유학(幼學) 성우경(成禹慶), 농민 하주명(河周明)과 민용훈 및 각 동의 집강들이었다.
처음 한천교 집회에서는 먼저 성우경이 나서서 역부를 징발할 당시 30명으로 규모가 축소되었을 때, 자신이 역부 모집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오해였다고 해명하였다. 이에 하명주가 나서서, 시흥군수와 성우경이 부동하여 협잡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반박하였다. 갑론을박이 일자 주동자들 사이에 시흥 관아로 가서 시비를 가리자는 중재로 인해 군중이 함께 읍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관아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경이었다. 이미 관아를 지키던 관속배들은 거의 도망을 쳤고, 집회 주동자들과 군수 사이에 시비가 붙어 언쟁이 벌어졌다. 관아에는 군수의 요청을 받고 일본인[석공(石工)들이라고 전함] 10여명이 대기 중이었다. 이때 수많은 군중이 들이닥치자 일본인들이 갑자기 장검과 철봉을 휘두르며 군중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광명리에 사는 민금석이 두개골과 어깨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지만 19일 사망하고 말았다. 하주명은 귀를 베였고 머리에 돌까지 맞아 혼절하였다. 이 밖에도 동몽(童蒙) 1명, 상제(喪制) 1명이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광명 아방리에서 온 김복성과 윤맹분, 김순필 등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인들에게 폭력적인 공격을 당한 군중들은 일단 관아 밖으로 나가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관아로 돌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수 박우양과 그 아들이 타살되었고 관아 건물이 파괴되었다. 군중들은 관아 옥사에 갇혀 있던 김원록을 풀어 주고, 역부 강제 징집 과정에서 농간과 협잡을 부린 이종렬과 김영학 등의 가옥과 집기들을 부수었다. 또한 중과부족으로 도망치는 일본인들을 추격하여 준성시차(俊成市次)와 희야애오랑(姬野愛五郞) 등 일본인 2명을 타살했으며 4명에게는 부상을 입혔다. 나머지 일본인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갔으므로 시흥 관아는 완전히 군중들에게 접수되었다.
당시 시흥 관아 습격 시위를 주동한 인물은 민금석의 조카인 민대개(閔大介)와 민준겸(閔俊兼) 형제 그리고 같은 광명리에 살던 이필봉·김자근봉·박점석·배우성·박치운·김길보 등이었다. 이어 군중들은 계속 읍내에 모여 있으면서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한편, 광명을 중심으로 시흥 지역에서 농민들이 궐기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에서는 순검을 파견함과 동시에 안종덕(安鐘悳)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게 하였다. 한성에 있는 주한일본공사관에서도 일본인이 살해당하였다는 전문을 받고 동대문 부근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 1개 소대를 급파하였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경부와 순사 등 4명을 파견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장교의 인솔 하에 헌병 5명을 광명 지역에 파견하였다.
소요가 발생한 지역은 대한제국 영토였다. 이 영토를 관리하는 정부는 안핵사와 순검을 파견했는데, 일본 쪽에서는 경찰과 함께 전투를 기본 임무로 하는 군대와 헌병 부대를 보냈다. 이는 광명 지역의 저항 운동에 대해서 일본이 명백하게 전투 행위로 규정하여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진압을 하겠다는 노골적인 책동이었다. 물론 일본인이 살해당하는 등 반일(反日) 감정이 극대화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을 철저하게 탄압함으로써 차후 일본군의 노동력 착취와 침략 행위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광명을 비롯한 시흥군 일대는 일본군의 출현으로 일시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7~8명 정도를 한 개 조로 편성한 일본군은 시흥 지역 마을을 돌며 무력시위를 하였고, 헌병과 함께 시흥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앞장 세워 봉기를 주도하였던 집강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농민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며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렇게 일본군과 헌병에 의한 수색과 체포가 계속되자 농민들은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사발통문을 돌리고 집회를 주도했던 민용훈 등은 이튿날 광명리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자신들의 정당성과 강제적인 역부 모집을 중단하라는 요구 사항도 내걸었다. 민용훈 등은 지역민의 굳은 총의를 대변하기 위해, 43개 동리 집강의 연명을 받아 군수 박우양의 죄상 10여 개조를 열거한 소장(訴狀)을 작성하여 경기도관찰부에 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임무를 맡아 경기도관찰부로 가던 철산리 사람 최영선(崔永先)이 도중에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어 성우경 등을 비롯한 나머지 주동자들도 차례로 체포되어 헌병주재소에 수감됨으로써, 광명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농민들의 저항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시위와 헌병의 강압 아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사건이 일단락되었음에도 광명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계속 반일(反日) 성향의 농민들을 감시하다가 한 달 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철병하였다. 이는 광명 지역의 반일 감정과 소요가 후에까지 지속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항 운동이 남긴 것들]
광명 지역 봉기에 대한 재판은 9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안핵사의 문초를 통해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주동자들에 대한 재판은 평리원(平理院)에서 진행되었다. 재판 결과, 봉기를 주도한 주동자로 지목된 김원록은 사형, 성우경·하주명·민용훈 등은 태 100대와 무기형이 선고되었다. 최종적으로 김원록은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고, 성우경은 15년형, 하주명은 10년형으로 감형되어 수감되었다. 민용훈은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지도군으로 보내졌다.
한편 일본 측은 광명 지역의 농민 봉기로 사망한 일본인 2명과 부상자 4명에 대한 배상금을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하였다. 일본공사관의 계속되는 겁박에 정부는 결국 3,232원의 배상금을 물어 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재판관은 일본인이 먼저 공격하여 소요가 발생했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했거나 최소한의 정상도 참작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인뿐만 아니라 광명리에 거주하는 농민 역시 일본인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으며, 극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정부는 이에 대해 일본 측에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못하였다. 강도 일본의 군대가 주둔해 있고 강압적으로 체결한 협약이 있다고 해도,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상적인 정부의 처사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 운동은 기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울과 인접한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봉기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광명 지역 농민들은 일본군과 주한일본공사관이 무자비하게 자행했던 강압적이고 무단적인 역부 동원과 이에 편승하여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던 지방관의 수탈에 전면적인 저항이었다. 이때 농민들은 여러 번의 집회를 통해 그들의 역량과 의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특히 자신들의 주장을, 대표적인 신문인 『황성신문』에 투고함으로써 여론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방식은 그때까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민요(民擾)의 양상과는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또한 봉기의 과정에서 군중들이 내세웠던 타도의 대상과 목표가 대한제국을 겁박하며 침략해 오는 강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군중들의 사회의식이 매우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봉기의 규모가 어느 특정 지역하나가 아니라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시흥군 전역이었든 점에서 외세에 대한 저항이 크게 확산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대한제국 정부가 농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강도 일본에 굴복하여 일본의 이익 확보에 일조하고 있을 때, 일반 농민 대중이 자유의사에 따라 결집을 시도하여 폭력과 강압에 저항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