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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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學生運動 |
이칭/별칭 | 광주학생독립운동,광주항일학생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효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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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30년 3월 - 광주학생운동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광주역 - 광주광역시 북구 무등로 235[중흥동 611-14] |
종결 장소 | 광주제일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237 33[누문동 144] |
종결 장소 | 광주교도소 - 광주광역시 북구 동문대로 261[문흥동 88-1] |
[정의]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항일 학생운동.
[개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민족 차별 교육 및 식민지 노예 교육에 반대한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이 유입되자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 청년들도 신흥 사상 수용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5학년 장재성, 왕재일, 광주공립농업학교[지금의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5학년 박인생 등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1926년 11월 3일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지 교육 체제의 반대 등 뚜렷한 민족적·사회적 방향을 대전제로 하였으나, 주요 구성원의 졸업으로 인해 조직 내용의 전환이 필요해졌다. 1927년 성진회는 독서회(讀書會)로 확대, 개편되면서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전남여자고등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고, 김기권과 장재성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1928년 11월 초에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장매성, 박옥련, 박계남 등 11명이 모여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쟁취,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녀회(少女會)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는 신간회 광주지회와 전남청년동맹의 지도와 지원을 받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을 전개해 나갔으며,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전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이 나주역에 도착하자 출구를 나오면서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인 박기옥, 암성금자, 이광춘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를 본 광주고등보통학교 박준채[박기옥의 사촌동생]가 이들과 다투게 되었고, 곧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 다음날인 10월 31일에도 통학열차 안에서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일본인 차장이 박준채와 수 명의 한국인 학생을 일본인 승객이 대부분인 2등실로 데려가 승객들과 함께 욕설을 퍼부으며 비난하였다.
11월 1일에도 싸움은 이어졌다. 그런데 싸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싸움을 말리는 교사와 경찰,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려야 할 할 기자 등이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 편만 들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인 조선 학생들은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되어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경과]
1929년 11월 3일은 메이지[明治] 천황의 탄생일을 기리는 명치절(明治節)로 일제는 각 학교에서 기념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를 부르지 않고 침묵으로 저항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편파적으로 보도된 10월 30일 나주역 사건과 이후 한일 학생간 충돌 사건의 기사 정정과 사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광주일보사에서 이를 거부하자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돌아가는 길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수기옥정(須奇屋町)[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5가] 부근에서 신사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들과 충돌하였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이 대거 모여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일본 경찰과 두 학교의 교사들이 현장으로 달려와 학생들의 해산을 설득하였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로 돌아온 한국인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오늘의 대승리를 신천지의 동포들에게 알리고 일제 타도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한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광주 시내를 전진하며 시위를 전개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교감인 와타나베[渡辺]는 11월 4일부터 3일간 휴교를 단행하였다. 당시 신문은 11월 3일의 시위를 10년 전 3. 1운동이 있은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으로 보도하였다.
휴교는 11월 9일까지 다시 3일간 연장되었고, 일본 경찰들은 한국인 학생 4~5명만 모여 있어도 학생들을 체포하고 편파적으로 사건을 처리하였다. 신간회를 비롯한 각종 사회 단체와 청년 단체는 투쟁을 효과적으로 이끌고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논의하고, 11월 12일에 2차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2일 오전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학우들이 구속되어 있는 광주형무소에 도착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일제는 대규모의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2차 시위 직후 수백 명의 학생이 검거되고 전라남도 각 군의 사회·청년 단체 간부들 16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학교의 비밀결사가 탄로나면서 1930년 1월까지 성진회, 독서회 관련 학생들이 계속 검거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전남사범학교는 학생들을 무기정학, 퇴학시키는 등 징계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총독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보도를 금지시켰다.
[결과]
광주 학생들의 시위에 호응하여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은 1929년 11월 19일 목포 시내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나주에서는 11월 27일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과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전라남도 지역의 여러 학교에서도 11월 말부터 1930년 2월까지 시위 또는 맹휴 투쟁을 벌였다.
서울에서는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 및 동맹 휴학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월 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서울에서의 시위를 통해 인천, 원산, 평양, 함흥, 부산, 춘천, 대구 등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 운동이 확산되었다. 더불어 학생들의 항일 시위는 북간도(北間島), 서간도(西間島)에서도 이어졌으며, 중국 상하이[上海], 일본 도쿄[東京],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미주(美州) 지역에까지 파급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부터 1930년 3월까지 전국 13부(府) 218군(郡) 2도(島) 중 12부[92.3%] 81군[37.2%] 1도[50.0%]의 학교들이 참여한 전국적인 민족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관내와 만주(滿洲)·노령(露領), 일본, 미주 등 해외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주도층과 참여층이 거의 학생들이었고 일부 사회 단체와 사상 단체 회원들이 관여하였다는 점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했던 3.1운동과 구별된다.
광주학생운동은 1920년대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된 동맹 휴학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 여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학원운동'과 '식민 노예 교육 철폐를 외치는 저항운동'을 넘어 "조선 독립 만세"와 같은 정치운동·독립운동의 수준으로 발전시킨 운동이었다. 특히 국내외 민족의 단합에 자극을 주고 민족운동 활성화의 동기를 부여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던 학생 상당수는 이후 민족운동에 투신하며 1930년대 민족운동을 촉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시작하여 전주, 부산 등 전국 320개 교에서 학생 5만 4000여 명이 참가하여 5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연해주·미주·일본까지 확산된 대규모 운동으로 영향력이나 역사적 의의에서 3.1운동에 결코 뒤지지 않은 항일 학생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