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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인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644
한자 喬桐印氏
영어공식명칭 Kyodong Insi|Kyodong I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남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교동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입향지 교동인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교동인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세거|집성지 교동인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통정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교동인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화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교동인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삼봉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교동인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성씨 시조 인서(印瑞)
입향 시조 인희윤(印希尹)

[정의]

인서가 시조이고 인희윤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교동인씨(喬桐印氏)는 당진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이다. 시조는 신라 시대의 인서(印瑞)이다. 당진에 입향한 것은 인희윤(印希尹)인데, 조선 후기인 17~1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인희윤은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인근 지역에 정착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석문면교동인씨는 당진의 최대 부호인 인근식(印謹植)과 당진 출신 최초의 장관인 인태식(印泰植)[1902~1974]을 배출하였다.

[연원]

교동인씨의 시조는 신라 14대 유례왕(儒禮王) 때 아찬(阿湌) 벼슬을 지낸 인서이다. 인서는 인품이 중후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왕이 태상 박사(太常博士)에 봉하고 아찬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인씨는 단본(單本)으로 고려 때에 많은 인재들이 등장하였고, 정승 반열에 오른 인물이 21명이나 되는 명문이었다. 특히 고려 말의 인당(印璫)[?~1356]은 대표적 인물이다. 인당은 1354년 전라도 만호로 있을 때 왜구를 무찔러 석성 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공민왕 때에는 서북면 병마사로 원나라와 맞서다가 순국하였다.

고려 말 함산군(咸山君) 인원보(印原寶)는 최영 장군이 유배될 때 이에 연루되어 상주(尙州) 함창(咸昌)으로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인원보의 아들인 인인경(印仁敬)이 낙향하여 아산시 탕정면 동산리에 정착하였다. 그 후 인인경의 자손은 10개 파를 형성하였는데, 일부는 그곳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입향 경위]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에 입향한 인희윤은 인인경의 5대손이다. 입향 시기는 17~18세기경으로 알려진다. 입향 경위도 전해지지 않으나, 아미산 기슭에 위치한 죽동리가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서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하며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교동인씨 당진 입향지인 면천면 죽동리는 입향조 인희윤 이래 번창하였다. 인희윤의 증손인 인홍필(印弘弼)의 후손이 죽동리 인씨의 주류를 이루었고, 인홍적(印弘績)의 후손은 죽동리 옆에 있는 송학리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또한 같은 항렬인 인홍헌(印弘憲)의 후손들이 석문면고대면에 집성촌을 이루어 자손이 번성하였다. 죽동리송학리교동인씨 가문에서도 많은 인물이 나왔지만, 석문 지역의 인씨 가문이 당진 지역 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인홍헌은 시조 인서의 52세손이다. 생몰 기간은 알 수 없으나 사촌인 인홍계(印弘契)가 숙종 대에 활동한 사실을 보면 인홍헌도 17세기 말에서 18세기경의 인물로 보인다. 인홍원은 면천면 죽동리에서 석문면 통정리로 분가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인홍헌의 자손이 어렵게 살 때, 이웃 부잣집에 온 지사(地師)가 푸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여 지사를 불러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 후 지사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명당인 현재의 인홍헌 묘소 터를 잡아 줘서 자손이 번영하고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 인물]

석문면의 인씨들은 작은 3개의 계파로 나뉘었다. 그중 원래의 통정리(通丁里)에 거주한 집안을 ‘통정리파’, 통정리의 동남쪽인 석문면 삼화리 찬동(讚洞) 마을에 이주한 집안을 ‘찬동파’, 통정리의 서북쪽인 석문면 삼봉리 새티(鳳峙) 마을에 거주하게 된 집안을 ‘새티파’라 한다.

통정리파가 터를 잡은 곳은 ‘원통정’이라는 자연 마을로, 입향조에 의해 조성된 동족 마을이다. 석문면의 면 소재지이며 석문 초등학교도 이곳에 있다. 통정리파의 특징은 면장으로 인익수(印益洙)[1882~1936]와 인홍수(印洪洙)[1868~1938]를 배출하였으며 근대화 과정에서 일찍 개화되었다는 점이다.

통정리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인권식(印權植)[1901~2000]과 인태식이다. 인권식은 당진 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 1회 졸업생으로 1938년 당진 번영회의 간사를 맡아보면서 군 단위 유지 모임을 주관하였고, 1938년에 호서 운수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수업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해방 후 충남 여객 사장을 맡았고 자유당 충남 도지부장을 역임하였다. 그 후 1960년 7월 29일, 제2 공화국의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인태식당진 공립 보통학교 2회 졸업생으로 경성 고등 보통학교[현 경기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북 제국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홍천, 청주 등지에서 세무서장, 강원도 재무부 간세과장을 지낸 후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에는 강원도 재무국장, 내무국장을 거쳐 정부 수립 후에는 재무부 사세국장, 관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5월에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8년 5월에는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당진 갑구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인태식은 1956년에 재무부 장관을 지냈고, 1958년에는 자유당 총무 위원장을 지내 당대 최고의 실세로 군림하였다. 1960년 7월 29일의 제5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하였지만 이후 민주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3년 11월 제6대 국회 의원에 당선됨으로써 3선 의원으로 재기하였다.

찬동파는 56세 인이수(印以秀)가 분가하면서 이루어진 집안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학수(印鶴洙)[1852~1918], 인학수의 손자 인장환(印章煥), 그리고 인학수의 아우인 인노수(印魯洙)와 인태수(印台洙), 인노수의 장남인 인철식(印喆植)과 인태수의 장남인 인근식을 꼽을 수 있다. 인학수는 한말에 통신사 전화과 주사를 지냈고, 인학수의 둘째 아들인 인문식(印文植)은 1902년 길주 감리서 주사를 지냈다. 또한 인노수는 1907년에 홍주 지방 위원회 위원, 1908년에는 서산 지방 금융 조합 설립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11년에는 통정리의 인홍수와 함께 당진군 참사로 활동하였다.

찬동파의 특징은 관직 생활을 한 인물도 있으나 경제적으로 매우 부유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인근식·인장환·인철식 등이다. 특히 인근식은 일제 강점기 당진 지역 제일의 갑부였다. 이들은 인근 마을의 농토와 당진의 동남부 지역에 있는 우평·강문 평야를 중심으로 토지 집적에 주력했다. 이들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원인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제염(製鹽)’의 운영과 ‘교역’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염전이 없었고 바닷물을 끌어다 끓여서 소금을 생산하는 ‘화염(火鹽)’이 있었다. 또한 주민들은 석문면 삼화리 포구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도 하였다. 삼화리는 덕적도에서 잡은 새우젓과 인근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이 교환되는 중심지였다. 당진의 교동인씨들은 이러한 제염과 교역을 통해 초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토지를 매입하면서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새티파는 찬동파를 이룬 인이수의 아우인 인이강(印以綱)이 분가하면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인물은 59세손 인정석(印貞錫)[1872~1952]과 아들인 인진수(印振洙), 손자인 인윤식(印倫植)을 들 수 있다. 이들도 지역의 토호 세력으로서 일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성향도 통정리파와 달리 보수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인정석은 찬동파의 인학수, 통정리파의 인홍수와 인익수 등과 함께 석문면 면장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일정한 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근현대 당진의 신흥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관련 유적]

당진시 면천면 죽동 1리에 있는 충정사(忠貞祠)석성 부원군 인당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이곳에는 인당의 영정이 봉안되었고 ‘첨의평리사사 석성 부원군 인당 장군 추모비(僉議評理司事 碩城府院君 印璫將軍 追慕碑)’라고 새긴 비가 있다. 석문면에는 입향조 인홍헌의 묘소 인근에 홍덕사(弘德祠)라는 제각이 건립되어 있는데, 매년 4월 5일 자손들이 모여서 대제를 지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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