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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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國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 일어난 6·25 전쟁 상황.
[개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쪽으로 계속 밀고 내려왔다. 유엔은 즉각적으로 참전을 결정하였고, 16개국의 군대로 유엔군이 편성되어 한국전에 투입되었다. 국군도 전열을 정비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낙동강에서 저지한 뒤, 9월 15일 유엔군과 함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서울을 수복한 국군은 북으로 진격하여 10월 말경에는 압록강에 도달하였다. 하지만 뒤이어 중국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겼고, 또 다시 수복하면서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치열한 공방전은 3년여 동안 치러졌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짐에 따라 전쟁은 종료되었다.
한반도 전역은 이 전쟁의 진행과 함께 엄청난 혼란에 빠졌고, 약 500만 명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으며, 수많은 전쟁고아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전쟁의 피해와 고통은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도 고스란히 미쳤고, 주민들은 좌우익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전쟁의 악몽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주민들의 생활에 어둡게 드리워 있다.
[경과]
한국전쟁에 있어서 가장 먼저 일어난 민간인 학살은 ‘국민 보도 연맹’에 대한 학살이었다. 국민 보도 연맹은 여순 사건이 후에 반공 검사들이 주도하여 “좌익 인사들을 전향·교화시켜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섭한다.”라는 취지로 만든 단체였다. 그러나 국민 보도 연맹은 ‘대한민국 절대 지지’·‘북한 정권 절대 반대’·‘공산주의 타도 분쇄’ 등의 강령에서 알 수 있듯이 ‘좌익 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 행동 부대였다. 강제 가입이 원칙이었고 지방에서는 할당된 인원수를 맞추려고 좌익 전력자 말고도 “쌀 준다.”, “비료 준다.”고 하여 주민들을 가입시켰다. 국민 보도 연맹은 창설 1주년 만에 연맹원 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당진 지역 주민 가운데에서도 상당수가 보도 연맹에 가입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증언에 의하면 이들 중 상당수의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가담했고, 중도에 친인척이나 혹은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 남한 곳곳에서는 이들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생한 직후 약 2개월 동안 남한 곳곳에서 학살된 국민 보도 연맹원 수는 10~15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진 지역 보도 연맹원이 모두 몇 명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진 경찰서에서도 중요 인물 20여 명을 한진 앞바다에 끌고 가 학살했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였고, 인민군이 당진 지역에 들어온 것은 7월 5~6일이었다. 우강면 공포리와 송악면 한진 나루 쪽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경로와 인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대대 병력으로 보이며 농민 복장에 인민군이 따발총을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당진읍 쪽으로 들어오면서 당진 주민들의 피난 행렬도 점차 증가되었다. 당진 경찰서에서는 7월 10~12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보도 연맹원을 한진에서 학살하고, 주요 인사들과 함께 7월 12~15일경 본격적인 후퇴에 들어갔다.
당진을 점령한 인민군은 ‘조국 해방 전쟁’과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방침 아래 약 3개월 남짓 여러 주민들을 억압하였다. 이들은 인민위원회를 비롯하여 민주 청년 동맹·여성 동맹·농민 동맹·문화 단체 총연맹 등 여러 가지 단체들을 조직했다. 구성원은 주민들로 하여금 참여케 했고 인민 위원장, 농민 위원장, 여맹 위원장, 청년 위원장 등을 선출하여 주민들을 감시·선동하는 데 이용했다. 마을 곳곳에도 농민 위원이 있어서 주민 생활의 모든 것을 통제했다.
이들은 농작물의 작황을 세밀하게 조사했는데 “배추 포기 수까지 셌다.”, “벼 나락까지 셌다.”라는 말이 은밀히 유포될 정도로 농민을 감시했다. 무엇보다 주민들을 피곤하게 한 것은 잦은 회의였다고 한다. 이들은 수시로 회의를 개최했고 불참한 주민을 괴롭혔다. 이러한 통제는 북한의 전시 동원을 처리하려는 의용군 선발로 이어졌다.
대구와 부산을 근거지로 반격전을 벌이던 유엔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을 계기로 전세를 한꺼번에 역전시켰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진격했다. 이런 와중에서 당진도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9월 20일경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북한군은 9월 27일과 28일 저녁, 또 한 차례의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는 당진 지역의 관공서, 경찰, 소방대, 국민회, 청년단, 이장, 반장에 이르기까지 우익 인사들이 죽음을 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당진읍내에서의 학살 장소는 당진 공동묘지로 현재의 농업 공사가 있는 자리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3차에 걸쳐 약 200~300명에 달하는 우익인사들이 학살되었다고 전한다.
[결과]
10월 2~3일경, 70여 명에 달하는 경찰 병력이 당진군에 진입함으로써 약 80일 동안의 인공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수복 직후 치안대를 중심으로 부역자에 대한 처단이 이루어지면서, 또 한 차례의 보복적 살인이 발생했다. 결국 한 지역에서 점령군이 바뀌면서 그때마다 전쟁 행위와 관계없는 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또 수많은 주민들은 경제적인 파탄으로 인하여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의의와 평가]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주요 산업 시설을 파괴하였고, 삶의 터를 잃어버린 주민들은 피난민이 되어 떠돌아 다녔다. 당진 지역에도 곳곳에 피난민이 이주해 왔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던 주민은 또 이곳을 떠나갔다. 전형적인 농경 지대였던 당진 지역 주민들이 경험한 전쟁의 피해는 경제 혼란에도 있지만 좌우익의 갈등 문제가 더 컸다. 좌우익의 갈등은 많은 주민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주민들 간에 회복할 수 없는 감정의 골을 만들었다. 수많은 시일이 경과한 현재까지도 전쟁의 악몽은 피해 주민들의 가슴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