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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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唐津浦萬戶 |
영어공식명칭 | Dangjinpo Manh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학로 |
[정의]
고려·조선 시대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되어 당진포진성에 주둔했던 수군의 관직.
[제정 경위 및 목적]
만호(萬戶)란 고려 말 원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서 처음 도입한 원나라 제도이다. 백성의 호구수에 따라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나눴으나, 점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장수의 품계를 뜻하는 말로 수군의 관직을 의미하게 되었다. 1458년(세조 4)에 진관 체제(鎭管體制)가 완비되면서 각 도 연해안의 요충지나 북방 내륙의 제진(諸鎭)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만호·절제도위(節制都尉) 등을 두어 그 진을 다스리게 하였다.
[담당 직무]
동첨절제사와 절제도위 등은 대개 독진(獨鎭)이 아닌 경우에는 지방 수령이 겸했지만 만호만은 무장(武將)이 별도로 파견되어 사실상 일선 요충지의 전담 무장이 되었다. 당진포 만호[종4품]는 보령의 충청 수영 산하였는데, 조선 시대 당진현의 현감이 종6품 벼슬이었으니 당진포 만호의 지위가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1458년(세조 4) 6월 29일 조에 의하면 "당진포 만호를 난지도(難知島)로 옮겼던" 사실과 "난지도가 물길이 험악하고, 얼음이 얼면 출입이 어려워 다시 당진포에 돌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진포 만호는 한때 난지도로 옮겨 운영되기도 하였고, 1458년에 다시 당진포로 옮겨 방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충청도 만호는 당진포 만호, 고만 만호, 서천포 만호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당진포진성(唐津浦鎭城)[충청남도 당진시 고대면 당진포리]에 만호를 두어 방어하였다는 사실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당진 지역이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의미한다. 해상 무역이나 조운선의 보호 외적의 침입 등 당진의 해안을 방어할 필요가 컸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