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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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應兪[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Do Eung Yu |
이칭/별칭 | 해보,취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厓). 고조할아버지는 첨사 도의문(都義文)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부위 도순경(都舜耕)이다. 할아버지는 우후 도흠조(都欽祖), 아버지는 도원량(都元亮)이다. 도원량은 용천(龍川), 청도(淸道), 초계(草溪)의 세 군을 역전(歷典)하였는데, 둘째 아들 도경유(都慶兪)가 영사 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에 녹훈되면서,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현풍 곽씨(玄風郭氏)로 장사랑 곽진(郭趂)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의인(宜人) 진천 송씨(鎭川宋氏)로서 생원 송징(宋澄)의 딸이다. 둘째 부인은 의인 영산 신씨(靈山辛氏)이며, 신유경(辛裕慶)의 딸이다.
[활동 사항]
도응유(都應兪)[1574~1639]는 10세에 서사원(徐思遠)에게서 수학(修學)하였고, 자라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 뒤에도 늘 두 선생 문하에서 『중용(中庸)』을 강(講)하고 정주서(程朱書)를 잠심(潛心)하여 성(性), 명(命)의 근원을 연구하고 공부에 힘써서 날로 진취하였다. 16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정경세(鄭經世)에 의해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활약했다.
[저술 및 작품]
1906년 도응유의 후손 도윤기(都胤基)가 남은 글을 모아서 『취애 선생 문집(翠厓先生文集)』을 간행하였다.
[묘소]
1639년[인조 17] 4월 11일에 정침에서 사망한 도응유를 화원 만화동 해좌(亥坐)에 장례를 지냈다.
[상훈과 추모]
1786년[정조 10] 대구 성서(城西)의 병암 서원(屛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