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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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建- 公山戰鬪 |
영어공식명칭 | Wanggeon’s Gongsan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손경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927년 - 왕건의 공산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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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공산전투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
[정의]
927년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개설]
후삼국 시기 고려와 신라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후백제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군사행동을 함께 하였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대구[대구광역시] 지역을 무대로 한 공산전투가 벌어졌다. 공산전투는 927년(태조 10) 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 견훤과 태조 왕건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산 53-3번지 일대는 왕건과 견훤의 공산싸움에서 신숭겸 장군의 군사가 파해서 흩어진 파군재가 있다.
[공산전투 당시 시대적 상황]
당시 여러 호족들 중에서 양대세력으로 성장한 후백제의 견훤과 태조는 외교상 화친을 맺고 있었으나 양자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견훤은 그즈음 신라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927년 9월 근암성(近盦城) [근암성(近巖城), 지금 경상북도 문경군]을 빼앗고, 이어 고울부(高鬱府)[지금 경상북도 영천시]를 공취한 뒤 경주로 군사를 밀고 갔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곧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하였다. 후백제군은 영천에서 신령-화산-호당-도동-임포-아화-건천-모량을 거쳐 경주로 진입하였다.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김효렴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이때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정기(精騎) 5,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동화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공산전투 전개과정]
1) 전개과정
후백제의 경주 함락, 그리고 경애왕의 죽음이라는 소식은 고려에도 곧바로 전해졌다. 왕건이 보낸 공훤이 기대했던 공적을 펼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 틈에 신라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점은 고려에게는 비상상황이었다. 이대로 경주에 친후백제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경상도 일대의 패권이 후백제에게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고려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후삼국통일의 주도권도 후백제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이에 회군하는 후백제군을 공격하고자, 기병 위주의 빠른 군대를 편성하여 파병하였다. 그 군대의 지휘는 왕건이 직접 맡았다. 왕건은 곧바로 신라에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조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경애왕의 복수를 해주겠다면서 후백제군과 싸우러 간다. 이러한 행위는 신라인들에게 고려에 대한 호감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왕건이 이끄는 5천의 정예 병력은 공산 동수로 향하였다. 공산 동수는 지금 대구 팔공산 동화사로 본다. 이곳에서 후백제군과 고려군이 접전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곳에 먼저 도착한 군대는 후백제군이 아닌 고려군이었다. 왕건이 거느린 고려군은 남하하면서 견훤의 루트를 모두 파악하여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였다. 5천의 기병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며, 왕건이 직접 이끌고 온 정예 병력이었다. 『삼국사기』에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웠다.”라고 되어 있다. 고려군이 이곳에 와서 잠복해 있었다. 고려군이 먼저 진을 치고 매복하여 후백제군을 맞이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후백제군 자체는 기민한 작전을 위해 움직인 병력이었으며, 수도에서 약탈로 사기가 드높아진 시점이었다. 또한 보름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했기에 체력적 여유도 가질 수 있었던 점을 비롯해 고려군보다 훨씬 유리했다. 이러한 후백제군은 고려군을 압도하였고, 결국 싸움의 주도권은 후백제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2) 고려군의 진행로
고려는 후백제의 군사적 행동과 신라의 구원 요청에 대해 1만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즉각적인 군사적 대응을 하였다. 그러나 이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경주는 함락이 되었다. 신라의 수도가 후백제에 의해 유린되고 또한 왕마저 살해 교체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상대적 우위를 확보해 가고 있던 고려의 입장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왕건이 직접 5천여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게 되었다. 대구의 공산 지역까지 온 왕건의 고려군은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팔공산 권역에서 멈추게 되었다. 견훤의 후백제군이 곧 대응하여 병력을 이끌고 온 탓도 있겠지만 이 시기의 대구 지역이 후백제의 세력권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고려군의 진행로는 대체로 팔공산의 서쪽 방면에서 동쪽 방면으로 진행되었다. 현재의 동구 서변동 지역에는 무태(無怠)라는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태만함이 없도록 하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왕건이 이 지역을 지날 때 이 지역 주민들의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무태 지역에서 동화천(桐華川)을 따라 북동쪽을 진행하다 보면 ‘연경(硏經)’이라는 마을을 지나게 된다. 이 연경이라는 지명 또한 왕건이 이 지역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와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고려군은 연경에서 계속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진행하여 지묘동과 미대동을 거쳐 갔을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백안동 또는 내학동 부근에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서 언급한 동수(桐藪)의 병력을 제압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공산의 동화사 아래를 통과한 왕건의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하여 능성고개를 넘어 계속 영천 방면으로 진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태조지(太祖旨) 는 고을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조그만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영천군의 읍치(邑治)로부터 30리쯤 떨어져 있다는 태조지는 대체로 은해사 입구로 추정되고 있다. 이 태조지의 전투에서 패한 고려군은 후퇴하게 된다.
고려군이 후백제군과의 첫 접전에서 패배한 후, 후퇴하여 군사를 재정비한 곳은 현재 서변천(西邊川)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로서 이 하천을 경계로 양군이 대치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살내를 중심으로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왕건이 이끈 정규군보다 먼저 파견된 강공훤의 선발대와 합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시 원기를 회복하여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밀어붙이면서 진출한 곳이 미리사(美利寺) 앞이었다. 현재 미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은 파군재에서 동화사로 올라가는 길과 파계사로 올라가는 길 사이에 위치한 지묘동의 왕산 아래 산기슭이다. 현재 신숭겸 장군의 순절단과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곳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긴 비각과 표충단이 서 있으며, 그 뒷산을 왕산이라 한다. 이 미리사 앞에서 치러진 전투가 공산전투의 과정 중 가장 치열했던, 양국이 전력을 다한 전투였다. 미리사가 있었던 왕산 아래서 전개된 전투는 현재 동화사와 파계사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시작되는 파군재라는 곳에서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났다.
3) 공산전투 패배
후백제군의 공격에 고려군은 수세에 몰렸고 왕건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 신숭겸 장군은 왕건을 위한 희생을 한다. 신숭겸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왕건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공산전투 당시 왕건과 함께 신숭겸은 군사를 지휘하며 싸움을 독려하였다. 하지만 점차 후백제군에게 밀리게 되고, 왕건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이에 신숭겸과 김락은 왕건을 위한 희생을 다짐한다. 이때 신숭겸은 자신을 왕건으로 행세해 후백제군을 속여 왕건을 피신시키고 대신 죽음에 이른다. 이에 왕건은 최대한 신숭겸의 유족에게 예를 다하였고, 지묘사를 건립하여 신숭겸의 명복을 빌었다. 지묘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신숭겸의 묘책을 높게 산 것이다. 고려군이 패배한 원인에 대해서는 경주를 함락시킨 후백제군의 사기가 높았던 점, 또한 그 과정에서 후백제군이 군량을 풍부하게 확보하였던 반면에 고려군은 확보한 군량이 열세하였던 점, 고려군은 5천의 정병이 개경으로부터 팔공산 지역까지 급히 달려오느라 군사들이 피로에 지쳤던 점, 공산지역의 동향이 후백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왕건이 전투수행에서 고초를 겪었던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공산전투와 관련된 지명유래]
왕건은 신숭겸과 김락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다. 왕건의 도주로는 파군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화천을 따라 동쪽으로 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지묘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봉무동에는 토성(土城)의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앉아서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다. 현재 동촌비행장 서쪽에 위치한 도동은 원래 장산군(章山郡)의 영현(領縣)인 해안현의 읍치가 위치해 있었던 곳이다. 속전에 의하면 왕건이 해안교 다리가 있는 부근의 들판을 지날 때 혹 후백제군이 나타날까 걱정하였으나 무사하게 되자 마음이 놓여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고 하여 이곳을 해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왕건은 도동을 거쳐 역시 동화천변을 따라 동쪽으로 가면 평광동(坪廣洞)에 이른다. 동화천변을 따라 평광동의 시량이 마을까지 이르렀던 왕건은 이곳에서 길이 막히자 산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산을 넘어 현재의 안심 지역인 대구광역시 동구 매여동 방면의 길을 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안심 지역은 속칭 ‘반야월(半夜月)’이라 불리며, 왕건이 이 지역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 도주로를 비춰주었다고 한 데서 연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