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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06
한자 美垈洞萬歲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of Midae-dong
이칭/별칭 미대동 3·1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4월 26일연표보기 - 미대동 만세운동 발생
발단 시기/일시 1919년 4월 28일 - 미대동 만세운동 확산
발생|시작 장소 미대동 만세운동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채봉식|채희각|채갑원|채학기|채경식|채명원|채송대|채재갑

[정의]

1919년 4월 26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와 강압적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는 가운데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가고, 국외에서는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으면서 만세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인천채씨(仁川蔡氏)들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당시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에서 동족부락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었다. 미대동에 살던 채학기(蔡鶴基)는 1919년 3월 8일 대구만세시위운동 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읽고 민족독립에 절실히 공감했다. 그 후 채학기는 독립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운동을 호소했다. 이에 채봉식(蔡奉植)·채희각(蔡熙覺)·채갑원(蔡甲元) 등이 채학기와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919년 4월 26일 오후 10시 무렵 미대동에 있는 여봉산(礪峯山)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의 함성은 미대동 주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1919년 4월 28일 이들 채학기·채봉식·채희각·채갑원은 친족인 채경식(蔡敬植)·채명원(蔡命元)·채송대(蔡松大)·채재갑(蔡再甲) 등과 함께 다시 여봉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후 그들은 팔공주재소(八公駐在所) 소속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대구에 위치한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헌병대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철폐하라”, “조선인도 자주력이 있다.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시 이들은 모두 10대에서 20대의 청년층이었고,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결과]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만세시위를 벌인 채봉식·채희각·채갑원, 채학기 등은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각 징역 8월에, 피고 채경식·채명원·채송대.채재갑 등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7호」위반 혐의로 각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의의와 평가]

미대동 만세운동은 대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동족부락이 일으킨 만세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최초로 열린 서문밖 만세시위운동 이후 꺼져가던 대구 지역 만세독립운동을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만세독립운동이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자리 잡는데 일조하였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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