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7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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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丙朝 |
영어공식명칭 | Seo Byeongjo |
이칭/별칭 | 대봉병조(大峰丙朝)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서병조(徐丙朝)[1886~1952]는 1886년 대구에서 서상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창씨명은 대봉병조(大峰丙朝)이다. 일제강점기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고 지방 공로자로서 일제로부터 표창을 받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활동 사항]
서병조는 1904년 사립 계정(桂亭)일어학교를 세우고 교사가 되어 일본어를 보급하였다.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실업계를 견학하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귀국한 뒤 대구잠업전습소를 경영하며 경제계에 첫발을 디뎠다. 이어 조선농회의 경상북도지회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13년부터 일본적십자사 대구지부에 협찬한 것을 시작으로 명치신궁봉찬회 조선지부 경북위원, 재단법인 대구상성회(大邱常成會) 평의원, 국민협회 상담역, 제국재향군인회후원회 부회장, 대구 녹화협회 회장,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 회장 등의 관변 활동을 펼쳤다. 또 재단법인 대구구락부회의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서병조는 1915년 경상농공은행의 이사로 선임되며 금융업에도 진출하였다. 1915년에는 대구전기주식회사의 감사역에 취임하였고, 1916년에는 자본금을 출자하였다.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 1919년 계림농업주식회사, 1920년 대동무역주식회사, 1924년 조양무진주식회사, 1932년 대구제사주식회사, 1938년 경북무진주식회사 등의 중역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구일부동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가 되었다. 서병조는 상공단체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20년대에 대구상업회의소, 1930년대에 대구상공회의소의 특별의원으로 추대되었다. 1944년에 조선총독부가 경북상공경제회를 설립할 때 설립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서병조는 조선총독부 지방 지배기구의 자문기관인 대구부협의회, 경북도회, 학교평의회 등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1934년에는 일제로부터 지방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서병조는 전시 동원 체제기인 1940년에 대봉병조(大峰丙朝)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0년 10월 16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하고 1941년 8월 24일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 장직상과 함께 경상북도 대표로 참여하였다. 1940년 12월 7일 대구 욱정공립국민학교 강당에서 최린·이성환 등이 참석하여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대회에서 15명의 상임이사에 들었다. 1940년 12월 22일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의 첨병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서병조는 1940년 10월 경영난에 빠진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학교명을 ‘대륜(大倫)’으로 바꾸었고, 재단 명칭을 자신의 창씨명인 ‘대봉(大峰)’을 따서 ‘대봉교육재단’으로 명명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대봉교육재단은 1948년 1월 25일 대륜교육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서병조는 1948년 4월까지 재단 이사장직을 수행하였다.
서병조는 광복 후 1946년 9월 종합대학재단조성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구 지역의 대학 설립 활동의 결과 대구문리과대학[현 영남대학교로 통합]이 설립되었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법률 제3호로 공포되고, 이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서병조는 1949년 2월경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하면서 서병조는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서병조는 1952년 2월 29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