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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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壽吉 |
영어공식명칭 | Kim Sugil |
이칭/별칭 | 김수길(金秀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1월 26일 - 김수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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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수길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7일 - 김수길 혜성단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4일 - 김수길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7월 19일 - 김수길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10일 - 김수길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김수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수길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금곡리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 |
학교|수학지 |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혜성단 단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수길(金壽吉)[1902~1932]은 1902년 1월 26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비밀결사 조직인 혜성단(彗星團)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김수길(金秀吉)’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대구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부터 4월 28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특히, 계성학교 학생들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 개신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 3·10 대구 동문시장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계성학교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등교를 금지하여 대구 지역 3·1운동을 약화하고자 하였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나 체포되지 않은 계성학교 학생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3·1운동을 일으켰다. 김수길도 고향인 김천에서 황금동교회 조사 김충한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3월 16일 대구로 돌아온 김수길은 이영식(李永植)·김수길(金壽吉)·이덕생(李德生)·이종헌(李鍾憲)·이기명(李基明)·이수건(李壽鍵)·이영옥(李榮玉) 등 계성학교 학생들 및 이명건(李命健)·최재화(崔載華)·이종식(李鍾植)과 함께 독립운동 방법을 전환하기로 결의한 뒤 4월 17일에 비밀결사 혜성단을 결성하였고, 이후 경성과 만주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김수길을 비롯한 혜성단원들은 4월 18일 「근고아동포(謹告我同胞)」, 4월 27일 「경아동포(警我同胞)」, 5월 7일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 등을 배포하였으며, 민족 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였다. 상인들에게는 폐점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통한 독립운동 참가를 촉구하였다. 또한 대구경찰서장과 친일 인사들에게 암살 협박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14일 김수길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19년 7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협박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았다. 김수길은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1심보다 높은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수길은 193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수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