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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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具龍徵 |
영어공식명칭 | Gu Yongjing |
이칭/별칭 | 대현(大見),경타재(警惰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충희 |
출생 시기/일시 | 1658년 - 구용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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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94년 - 구용징 이이와 성혼 문묘 복향 상소에 소수로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715년 - 구용징 사망 |
출생지 | 무태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 |
거주|이주지 | 무태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서변동 |
수학|강학지 | 무태 -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서변동 |
성격 | 학자 |
성별 | 남성 |
본관 | 능성(綾城) |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구용징(具龍徵)[1658~1715]의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자는 대현(大見), 호는 경타재(警惰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첨정 구회신(具懷愼)이고, 할아버지는 구인계(具仁繼)이다. 아버지는 구시웅(具時雄)이고. 어머니는 전유익(全有翼)의 딸 옥천전씨(沃川全氏)이다.
[활동 사항]
구용징은 1658년(효종 9) 대구 무태(無怠)[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서변동]에서 태어났다. 크고 작은 향시(鄕試)에 열여섯 번이나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벼슬길을 단념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언행록(言行錄)』을 탐독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83년(숙종 9)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상을 당하자 곡반(哭班)[국상(國喪) 때 곡을 하던 벼슬아치의 반열]에 참여하였고, 집에 단을 설치하여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아침에 제사를 지내며 망곡례(望哭禮)[조선 시대에, 국상이나 국기일에 직접 빈소와 능묘에 가지 않고 그곳을 향하여 슬피 곡을 하며 지냈던 의례]를 행하였다.
1689년(숙종 15) 남인들이 상소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묘 배향을 취소하게 되었는데, 1694년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구용징은 기호(畿湖) 지방 유생의 소수(疏首)[연명(連名)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로서 복향(復享)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려 관철시켰다. 또 김장생(金長生)의 문묘 배향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구용징은 1715년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구용징의 저술로는 『경타재문집(警惰齋文集)』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