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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96
한자 孤山書堂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22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민선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 고산서원 훼철
건립 시기/일시 1879년 4월 16일 - 고산서당 재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4년 - 고산서원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7월 25일연표보기 - 고산서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6월 29일 - 고산서당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고산서당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22 지도보기
원소재지 고산서당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22
성격 서당
양식 홑처마 팔작 지붕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경주 최씨 문중
관리자 서병연
문화재 지정 번호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조선시대 서당.

[개설]

고산서당은 원래 서원이 있던 자리에 있는데, 정확한 최초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강학하였다는 데서 150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명종 때에 재실을 짓고 재(齋)는 ‘고산(孤山)’, 문(門)은 ‘구도(求道)’로 한 퇴계의 수필(手筆)을 받았으며, ‘求道’라는 편액은 지금도 남아 있다. 1690년(숙종 16)에 퇴계 이황우복 정경세를 배향하는 사당을 짓고 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734년(영조 10)에 강당 및 동·서재를 짓고, 1746년(영조 22)에 서원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879년(고종 16) 4월 16일에 경산 유림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어 옛 고산서원 터에 강당만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란 편액(扁額)을 걸었다. 1879년에 지은 건물이 지금의 고산서당이며, 1964년에 중수하였다. 서당 뒤편의 옛 사당 터에는 퇴계 이황우복 정경세의 강학 유허비가 있다.

[위치]

고산서당성동의 서원골 산 중턱에 자리하며, 서당의 앞쪽에는 남천이 흐르고 있다.

[형태]

고산서당은 기단 위에 북향으로 배치되었다.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의 대청, 대청의 좌우에 각 1칸이 온돌방이며 건물의 앞면, 대청의 뒷면, 우측 온돌방에 좁은 쪽마루가 있다. 구조는 3량가(三樑架)이며, 정면 가운데 하나만 둥근 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간결한 형식이다.

[현황]

고산서당은 보존 및 관리 상태가 양호하여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산서당은 간소한 서당 건축이며,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좋은 건축사 자료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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