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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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飢餓- |
영어공식명칭 | Gia Demo|Demonstration from Starv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3월 11일 - 기아데모 첫 번째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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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4월 1일 - 기아데모 두 번째 발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7월 1일 - 기아데모 세 번째 발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6년 8월 19일 - 기아데모 네 번째 발생 |
종결 시기/일시 | 1946년 10월 1일 - 기아데모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북도청 자리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
성격 | 사회운동 |
[정의]
1946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발생한 데모.
[개설]
광복 후 우리나라는 식량문제가 최대의 현안이었다. 패망 직전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남김없이 거두어 갔고 우리나라의 식량 재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 당국은 ‘미곡 최고 가격제’, ‘미곡 수집령’ 등의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러한 식량 위기는 지금의 대구광역시에 해당하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심각하였다. 1946년 2월 초 초대 대구부윤 이경희(李慶熙)가 발표한 담화문에는 “식량문제의 자주 해결이야말로 자주독립 능력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결국 대구 지역에서는 담화문이 발표되고 한 달이 지난 1946년 3월부터 10월항쟁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견디다 못한 귀환동포들이 중심이 된 빈민층이 관청으로 몰려가 기아데모를 벌였다.
[역사적 배경]
실제 기록을 보면, 1946년 3월 무렵 대구에서 배급 쌀이 필요한 사람은 대구 인구의 90%인 22만 8719명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아 식량의 가격도 1946년 2월 소두 한 말[닷 되] 150원에서 3월에는 270원으로 급상승하였다. 1946년 3월 대구 지역 소학교 학생의 절반 이상이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여 굶어야 하였고, 아침이나 저녁은 죽으로 때우는 실정이었다. 특히 해방을 맞아 귀국한 해외동포나 빈민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식량 배급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실제로 인근 지역인 경상북도 청송 지역 내에서만 200여 명이 굶어 죽었다는 신문보도가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1946년 6월에는 대구 지역에서 콜레라까지 발생하였고, 이 때문에 통행이 차단되면서 식량 부족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경과]
대구 지역에서 기아데모가 발생한 것은 1946년 3월 11일이 시작이다. 쌀자루를 든 수백 명의 시민이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있었던 경상북도청에 몰려가 쌀을 달라는 데모를 벌였다. 두 번째 기아데모는 1946년 4월 1일 오전에 발생하였는데, 대구역 근처의 해방촌이라는 빈민촌에 사는 80여 명의 여성이 아이들을 들쳐 업고 대구부청 앞으로 몰려가 “배급 쌀 주소”, “배고파 죽겠소”라는 구호를 외쳤다. 세 번째 기아데모는 1946년 7월 1일 오전 8시 무렵 대구부청 앞 광장에 수천 명의 시민이 “배고파 못 살겠소”, “쌀을 주오”라고 외치며 벌인 데모였다. 네 번째 기아데모는 1946년 8월 19일 경상북도청에 수백 명이 도청 광장에 드러누워 벌인 데모였다. 이때 대구 지역민들은 미군정 식량 책임자와의 면담을 요구하였다. 10월항쟁이 일어난 1946년 10월 1일 수백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이 오전에는 대구부청에서, 오후에는 경상북도청에서 쌀을 달라며 기아데모를 벌였다.
[결과]
기아데모는 10월항쟁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기아데모는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과 식량 배급 정책을 원인으로 일어난 식량 부족 사태에서 자연적으로 전개되었고, 최종적으로는 10월항쟁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