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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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硏經書院 大邱敎育- 原流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본욱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에 있었던 대구 최초의 서원.
[개설]
연경서원은 1563년에 건립되었으며 1세대, 2세대, 3세대 유학자를 양성하여 대구를 교육과 문화, 학술의 고장으로 만든 대구교육의 원류이다.
[연경서원의 건립]
연경서원(硏經書院)은 1563년(명종 18) 가을에 건립을 시작하여 1564년에 3월에 상량을 하고 1565년 겨울 10월에 완공하였다. 건립을 주관한 사람은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과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이다. 매암은 안동의 예안 출신으로 중년에 대구로 이거하여 북구 연경동 화암(畫巖) 아래 거주하였다. 매암과 계동은 모두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제자이다. 그 외에 퇴계의 사숙(私淑) 제자(弟子)인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 등도 협력하였다. 서원의 건립에 필요한 재정과 물력은 대구 지역의 유림가(儒林家)에서 제공하였으며 대구부사의 지원을 받았다.
서원의 명칭은 서원이 소재하였던 동명(洞名)인 연경리(硏經里)에서 유래되었다. 연경서원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북구 연경동과 동구 지묘동에 걸쳐 있다.
연경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건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비롯되었는데, 즉 연경서원 또한 당시 서원 건립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았다. 연경서원의 건립은 당시 대구의 횡당(黌堂)[서당]에서 공부하던 지역의 선비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때에는 소수서원이 창건된 지 20년이 되는 해로 당시에 해주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성주의 영봉서원(迎鳳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등은 이미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연경서원은 당시의 서원과는 구별되는 차이점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타 지역의 서원은 모두 지역의 수령이 건립하였는데 반하여, 연경서원은 대구 지역의 유림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출연하여 건립한 것이다. 또 연경서원은 처음 건립하였을 당시에는 사당이 없는 서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연경서원은 제향(祭享)보다는 강학(講學)을 위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퇴계는 연경서원의 「기문후기」와 시(詩)를 보내어 서원교육의 목표를 제시하며 격려하였다.
“일찍이 생각건대, 지금의 학교가 도처에 두루 있으니 여기에서 공부하며 거(居)하면 족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서원에서 이와 같이 간절히 추구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학사행정에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학문[吾學]’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고을의 사람들이 협력하여 크게 이 서원을 지은 것이 어찌 공연한 일이겠는가? 이끌고 분발하게 하여 진실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퇴계는 위의 글에서 당시에 관학(官學)이었던 향교와 서원 교육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퇴계는 “학사행정에 구속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학문’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목표는 위기지학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학문은 성리학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원 교육은 인격의 수양을 바탕으로 한 위기지학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연경서원의 교육]
연경서원은 건립한 이후 대구 유학의 2세대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들의 교육을 담당한 스승은 1세대이다. 1세대는 1530년대 출생으로 퇴계의 제자이거나 사숙 제자이다. 매암 이숙량, 계동 전경창, 송담 채응린, 임하 정사철 등이다. 그러나 위 1세대 중에서 이숙량은 서원을 건립한 지 얼마 후에 다시 안동으로 돌아감으로써 연경서원은 전경창 등이 강학을 주도하였다.
괴헌 곽재겸은 「계동 전경창에게 한 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폐읍(弊邑)[대구]을 돌아보니 선비들이 공부할 장소가 없었습니다. 이에 서원의 건립을 부르짖으니 이대용(李大用)[이숙량의 자(字)]이었습니다. 공(公)[전경창]이 오직 그를 도와 함께 그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터를 잡아 집을 지으니 지묘(智妙)의 물가였습니다. 그윽한 곳에 홀연히 이루어지니 갑자년(甲子年) 봄이었습니다. 이를 이루고 경영하여 또한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것을 창건하니 현송(絃誦)할 곳이 있었습니다. 화암(畫巖)의 봄이 깊고 옥계(玉溪)의 가을이 깊어갈 때 학도들이 쫓아 노닐며 시를 읊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부지런히 학문을 논하며 정성스럽게 권면하고 장려하였습니다.”
위의 글은 전경창이 2세대 유학자를 대상으로 강학[수업]한 것을 말하고 있다. 이때 강학을 받은 2세대 유학자는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1553~1634],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1547~1615],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 엄약재(儼若齋) 전춘년(全春年)[1552~1592],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1550~1618],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1553~1594] 등이다.
1세대 유학자들이 타계한 후 연경서원은 2세대 유학자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대구부사는 연경서원을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임진왜란 직전에 대구부사를 역임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1588년(선조 21) 10월 4일에 연경서원을 방문하였다.
“4일 맑음. 아침 일찍 연경서원으로 갔다. 유생들에게 ‘난옥배시(‘暖玉杯詩)’와 ‘간원존고부(諫垣存稿賦)’를 짓게 하였다. 감역(監役) 서사원(徐思遠)과 생원 전춘년(全春年)과 함께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위의 글에서 대구부사가 방문하여 학생들을 시험하고 격려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연경서원에는 대구부사와 경상도 관찰사 등 많은 관리들이 방문하였다.
연경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왜란이 종결된 지 4년 후 1602년 7월에 다시 서원의 일부를 중건하였는데, 이후 2세대 유학자들은 1세대 유학자의 강학을 계승하여 대구 지역 전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학을 실시하였다. 1605년부터 대구 지역의 전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강(通講)을 실시하였다. 통강은 서원 교육의 독특한 방법으로 “경전의 일정 부분을 스스로 공부한 후 스승의 앞에서 강(講)[외움]을 하여 평가를 받는 방법”이다. 요즈음의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시험과 같은 의미이다.
대구 유학의 2세대들이 3세대를 대상으로 통강(通講)을 한 기록, 요즈음 용어로 말하면 학적부에 해당하는 자료가 옻골의 경주최씨(慶州崔氏) 백불암(百弗庵)[최흥원(崔興遠), 1705~1786] 종가에 남아 있다. 2012년에 이 통강록이 『대구유현통강록(大邱儒賢通講錄)』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강학에 참여한 학생의 명단은 모두 108명이다. 그리고 강학에 참여한 사람으로 과거 등을 통하여 관직에 나아간 사람을 합하면 모두 136명이다. 이 강학을 주도한 스승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과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이다. 1607년에 대구부사로 부임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매월 통강에 참석하였다.
통강의 절차에 대하여 손처눌의 『모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먼저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비롯한 송나라 학자 6명의 화상(畫像)에 배례(拜禮)를 한 후에 강당(講堂)[마루]에 올라 강(講)을 하였다. 매월 초하루나 보름에 연경서원에 모이기도 하였고, 혹 선사재(仙査齋)에 모이기도 하였다. 성현의 잠언(箴言)을 강당의 벽 위에 걸어 놓고, 북쪽의 벽 아래에 스승의 자리를 설치한다. 선생[손처눌]이 낙재선생[서사원]과 나란히 앉으면 학생들은 앞으로 나와서 배례(拜禮)하고, 이어서 3면으로 나누어 서서 서로 향하여 읍례(揖禮)[인사]를 한다. 자리를 정하고 앉으면 유사(有司)[진행자]가 소리 내어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학교모범(學校模範)’을 한 번 읽는다. 직월(直月)[당번]이 여러 학생들의 선악(善惡)을 기록한 장부를 올리면 선생은 선행(善行)을 한 자에게는 칭찬을 하고, 악행(惡行)을 한 자는 경계하고 가르친다. 그 후에 학생들은 각기 읽은 책으로 진강(進講)을 하는데, 이때에는 반드시 단정하게 손을 맞잡고 바르게 앉아서 서로 돌아보며 이야기할 수 없다. 성현의 글과 사학(史學)이 아니면 강(講)을 허락하지 않고, 혹 연고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면 사유를 적어 유사에게 고하여 스승에게 알린다.”
위의 글에 의하면 연경서원에서 행한 통강은 매우 엄격하게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위 통강은 1605년에서 1613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이후 서사원의 병으로 인하여 일시 중단되었다.
대구의 유림은 1613년(광해군 5)에 사당을 건립하여 퇴계 이황을 봉안하였다. 1622년(광해군 14)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배향하였으며, 1706년(숙종 32)에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를 배향하였다. 그리고 1635년(인조 13)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여 계동 전경창을 봉안하였으며, 1707년(숙종 33)에 매암 이숙량을 봉안하였다. 이후로 연경서원은 제향과 강학을 함께 구비한 서원이 되었다.
[대구교육의 원류, 연경서원]
1615년에 서사원이 타계한 후 손처눌은 62세의 고령임에 자신의 강학소인 영모당(永慕堂)으로 옮겨 통강을 실시하였다. 그는 1634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홀로 20년간 통강을 실시하였다. 손처눌이 행한 통강을 기록한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는 모두 202명이 기록되어 있다. 대구 지역의 통강은 1차와 2차로 나눌 수 있는데, 1차는 1605년부터 서사원이 타계한 1615년까지이고, 2차는 손처눌이 통강을 실시한 1615년부터 타계한 1634년까지이다. 1차 통강을 제외하고 2차에 참여한 사람은 129명이다. 1차와 2차를 모두 합하면 265명이다.
연경서원은 대구 지역에서 처음으로 건립된 서원으로 창건 당시부터 강학에 중점을 두었다. 1세대 유학자인 이숙량과 전경창은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 류요신, 정광천, 이주 등 2세대 유학자를 양성하였으며, 2세대 유학자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중건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통강을 통하여 265명의 3세대 유학자를 양성하였다. 다시 말하면 연경서원이 창건된 후 1세대 유학자들에 의하면 시작된 강학[1565]이 두 세대를 거치면서 70여 년 후, 즉 2세대에 의하여 통강이 실시된 지 30년 후에 대구 유학[성리학]의 르네상스[황금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연경서원은 대구를 교육과 문화, 학술의 도시로 만드는 원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