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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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林- 獨立請願運動[達城郡] |
이칭/별칭 | 제1차 유림단 사건,파리 장서 사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정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출신의 유림들이 참여한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의 독립 선언서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림계는 국제 활동의 사명은 유림에서 맡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여론을 조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남 지역의 유림을 대표하는 곽종석은 김창숙과 상의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 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경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달성군의 유림은 조석하(曺錫河), 권상문(權相文), 우성동(禹成東), 우찬기(禹瓚基), 우경동(禹經東), 우승기(禹升基), 우하교(禹夏敎), 서건수(徐健洙), 김용호(金容鎬),박순호(朴純鎬) 등이었다. 장서의 핵심적 내용은 1)여러 나라 여러 겨례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2)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으며, 3)한국은 삼천리 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 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4)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하였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하였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 선전을 하고 있으며, 5)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 평화 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 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 평화 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 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결과]
1919년 3월 22일 김창숙은 137인의 서명을 받아 작성된 ‘파리 장서’를 휴대하고 출국하여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 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였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달성군에서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에 참여한 우찬기 등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세계 열강에 의존하려 한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개항기 이래 망국 책임론으로 위축된 유림계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