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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308
한자 桐華寺 地方學林 萬歲運動[東區]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of Donghwasa Local educational institu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8일 -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 모의
종결 시기/일시 1919년 5월 19일 -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 대구복심법원 판결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30일연표보기 -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 만세시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 대구복심법원에서 9명 전원 징역 10개월
발생|시작 장소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 -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 35]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윤학조|권청학|김문옥

[정의]

1919년 3월 30일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 학생들이 대구광역시 중구 남문밖시장에서 전개한 만세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와 강압적인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에 독립을 열망을 키우고 있을 때, 국외에서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 혁명 등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면서 2·8독립선언이 이어져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만세독립운동이 발생하였다. 불교중앙학림학교 교장이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한용운이다.

[경과]

불교중앙학림학교(佛敎中央學林學校) 학생 윤학조(尹學祚)는 1919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파고다 공원에서 거행된 만세시위를 참가한 후 사명을 띠고 고향인 달성군 공산면(公山面)[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일대]으로 내려왔다. 1919년 3월 23일 윤학조는 동화사로 가서, 동화사 소속 지방 학림(地方學林) 학생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에게 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대구지역에서도 민족 독립을 위해 학생들이 궐기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 결과 동화사 소속 지방 학림 학생들은 처음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의 백안시장(百安市場)에서 만세운동을 시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윤학조는 백안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해도 효과가 작기 때문에 남문밖시장에서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학조의 권유를 받은 동화사 지방 학림 학생대표 김문옥·권청학은 1919년 3월 28일 지방학림 전원을 동화사 내 심검당(尋劍堂)에 모이도록 했다. 김문옥은 학생들에게 “신문 기사를 보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내 각지에서는 벌써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들도 조선민족의 일원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발의(發議)하였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였다. 심검당에서 학생 일동이 협의한 끝에 다가오는 장날 즉 1919년 3월 30일 남문밖시장에서 의거를 단행하기로 약속하고, 비밀리에 이날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1919년 3월 29일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 9명 학생들은 준비물을 감추어 가지고 동화사를 출발해 대구 동화사 출장소 김상의(金尙儀) 방에 유숙하였다. 다음 날 1919년 3월 30일 김문옥은 소지하고 온 백포(白布)로 만든 큰 태극기를 장대에 달아 들고 학생 일동과 더불어 남문밖시장으로 잠입했다. 1919년 3월 30일 오후 2시 남문밖시장에 군중이 약 3천 명[판결문에는 약 2천 명]으로 불어나자, 학생들은 시장 중앙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남문밖시장에 있던 군중도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어 학생들을 선두로 하는 군중 시위대가 시장을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급보를 받은 일 군경이 달려왔다.

[결과]

일제 관헌은 남문밖시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군중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검거하였다. 이성근(李成根)·김문옥(金文玉)·이보식(李普湜)·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김윤섭(金潤燮)·허선일(許善一)·이기윤(李起胤)·권청학(權淸學) 등이 검거되었다. 이들 9명은 1919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다시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화사 지방학림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운동을 이어받아 대구지역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참고문헌]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12)
  •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20-국내 3·1 운동Ⅱ(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대구의 뿌리 달성』 1-달성을 되짚다(달성문화재단·달성군지간행위원회, 2014)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
  • 독립기념관(http://www.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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