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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8309
한자 性理學- 象徵 -, 孤山書堂
영어공식명칭 Zelkova & Gosan-seodang, a Symbol of Neo-Confucianism
분야 지리/동식물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로37길 39-3[성동 172]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판권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 건축물과 느티나무의 문화사적 의미.

[개설]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중국 동부, 타이완, 일본 등에도 분포하는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전국의 산기슭과 들, 골짜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느릅나뭇과의 낙엽활엽교목이다. 생장 속도가 빠른 속성수(速成樹)이면서도 내한성이 강하여 전국적으로 조경수로 많이 이용한다. 특히 높이 30m에 이를 정도로 크게 자라면서 나무의 형태까지 아름다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아끼는 나무 중 하나이다. 특히 넓은 그늘을 드리워 정자나무로 사랑받으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경험을 전달하는 광장이 되어 왔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느티나무는 예부터 신령스러운 나무, 즉 신목(神木)으로 모시던 대표적인 나무이다. 느티나무가 마을을 굽어보는 자리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 구실을 하는 사례는 전국 곳곳에서 발견된다. 신목으로서의 느티나무는 우주목(宇宙木) 혹은 세계수(世界樹)에 해당한다. 우주목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하늘로 뻗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만, 주로 느티나무처럼 오랫동안 살아가는 나무에게 부여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서 ‘밀레니엄 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한 것도 느티나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주목이기 때문이었다.

대구광역시에도 느티나무 노거수가 적지 않다. 나이가 많은 노거수는 생태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연륜 연대학(年輪年代學)[나무의 나이테를 통하여 과거 기후변화와 자연환경을 밝혀 내는 학문] 차원에서 보면 노거수는 노거수 나이만큼의 역사를 품고 있다. 유물이나 문헌만이 역사 지료가 아니라 나무도 중요한 기록의 자료에 해당한다.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문헌에서 밝힐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거수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한 그루의 노거수는 자신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생명체의 목숨을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느티나무를 비롯한 노거수는 생태계나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하여야 한다.

[느티나무라는 이름]

일설에는 느티나무라는 이름은 생장 속도가 빨라 늙은 티를 내는 나무로 보인다고 하여 ‘느티’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우리말 어원사전』에 따르면, 느티나무라는 이름은 누를 황(黃) 자의 ‘눌’과 회화나무 괴(槐) 자가 결합된 ‘느튀나모’에서 유래하였다. 느티나무의 이름이 황과 괴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은 느티나무의 잎이 누렇고, 나무의 형태가 회화나무와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는 생물학적 분류로는 상당히 다른 나무이지만,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회화나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527년 최세진(崔世珍)[1468~1542]이 지은 어린이용 한자 초학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느티나무를 푸른 느릅나무인 ‘청유수(靑楡樹)’ 혹은 잎이 누른 느릅나무인 ‘황유수(黃楡樹)’라 불렀다. 어른들이 느티나무를 괴목(槐木)으로 불렀던 것도 느티나무가 회화나무와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느티나무를 ‘버금 홰나무’라 부른다. 중국 청나라 정초(鄭樵)가 지은 『통지(通志)』에 따르면, 느티나무를 느릅나무류로 본 것은 느티나무 열매가 느릅나무 열매, 즉 유전(楡錢)을 닮았기 때문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옛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를 사대부·성리학자의 무덤이나 집에 심으며 학자수(學者樹) 또는 선비나무로 여겼다고 하는데,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에 과거를 치렀기에 합격을 기원하는 나무가 되었던 데에서 유래하는 풍습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회화나무는 유학을 유교로 삼은 한나라를 거치면서 한층 중요한 나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성리학이 중심 사상이었던 송나라를 거치면서 그 지위는 더욱 강화되어 그야말로 회화나무가 성리학의 상징이 되기에 이르렀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도 회화나무는 중요한 나무로 여겨졌다. 회화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큰 학자나 큰 인물이 태어나는 것으로 믿었고, 임금이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내리는 상에 회화나무가 포함되기도 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리는 어사화도 회화나무의 꽃으로 만들어졌다. 궁궐이나 관청, 그리고 향교·서원을 중심으로 회화나무를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니, 조선시대에 창덕궁과 성균관을 비롯하여 여러 향교와 서원 등에 심어진 몇몇 회화나무는 현재까지도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 회화나무는 우리나라에 자생하지 않아 쉽게 구할 수 없었고, 대개는 그리 오래 살지도 않았다. 회화나무를 대신할 것이 필요하였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회화나무와 비슷한 느티나무이다.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는 생물학적 분류상으로 상당히 다르지만, 과거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비슷하게 생각하였으니 심지어 한자로 회화나무 괴(槐) 자는 느티나무 괴 자로도 쓰일 정도였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생장 속도가 빠른 속성수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회화나무에 비하여 수명이 길었다. 현재 우리나라 천연기념물을 보더라도, 회화나무 천연기념물이 다섯 그루인데 느티나무 천연기념물은 열여덟 그루이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노거수의 절반이 느티나무일 정도로 느티나무는 긴 수명을 자랑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회화나무를 대신하여 느티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시대의 서원을 보면 회화나무 대신에 느티나무를 심은 곳이 많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령이 몇백 년이 되는 느티나무가 흔히 발견되는 장소 중 하나가 서원이다.

[고산서당과 성동 느티나무]

대구광역시 지역에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적지 않은데,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고산서당(孤山書堂)에 있는 성동 느티나무도 그중의 하나이다. 고산서당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172에 있는 서당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강학하였던 곳으로 유명한 서원이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이황·정경세와의 관계로 볼 때 조선 전기 1500년대에 건립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명종 때에 대구 지역의 유림들과 경산현령 윤희렴(尹希廉)이 재실을 짓고 이황에게 재호(齋號)를 청하여 재(齋)는 ‘고산(孤山)’으로, 문(門)은 ‘구도(求道)’로 정한 친필을 받았다. 당시 ‘구도’라고 쓴 편액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97년(숙종 23) 중수하고 1690년(숙종 16)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고산서원(孤山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이황정경세를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79년에 지역의 선비들을 중심으로 강학계(講學契)를 조직하여 강당을 중건하고 다시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로는 1964년에 수리하였다. 규모는 앞면 네 칸, 옆면 두 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퇴도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유허비(退陶李先生愚伏鄭先生講學遺墟碑)가 서 있다.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고산서당 느티나무’라고도 불리는 성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고산서당을 지켜 온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일컫는다. 이 두 그루 중 한 그루는 ‘이황 나무’라 불리는데, 이황고산서당에 편액(扁額)[현판]을 ‘고산(孤山)’으로, 문액(門額)[문의 글씨]을 ‘구도(求道)’로 지어 준 일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다른 한 그루는 ‘정경세 나무’로 불리며, 정경세가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재임하던 시절 고산서당에 와서 강학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느티나무는 속성수이기 때문에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 두 느티나무는 수령을 32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3년 1월 16일 두 나무는 ‘역사 나무’라는 명목으로 대구광역시 보호수 지정 번호 6-9에 함께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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