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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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退陶 李先生 愚伏 鄭先生 講學遺墟碑 |
영어공식명칭 | Toedo Iseonsaeng Ubok Jeongseonsaeng Ganghak-Yuheobi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로37길 39-3[성동 17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건립 시기/일시 | 1872년 - 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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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01년 - 이황 출생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63년 - 정경세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70년 - 이황 사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33년 - 정경세 사망 |
현 소재지 | 고산서당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22 |
성격 | 유허비 |
양식 | 대석|비신|개석 |
관련 인물 | 이황|정경세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96㎝[높이]|47.5㎝[너비]|19㎝[두께] |
소유자 | 고산서당 |
관리자 | 고산서당 |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고산서원의 유허비.
[개설]
조선시대 서원 건축물인 고산서당(孤山書堂)[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은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강학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6세기에는 이미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690년(숙종 16)에 이황과 정경세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지은 다음 ‘고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산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지역 유림이 그 옛터를 보존하기 위하여 1872년(고종 9) 퇴도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유허비(退陶 李先生 愚伏 鄭先生 講學遺墟碑)를 세웠고, 1879년(고종 16)에는 강학계를 조직하여 옛터에 강당만 다시 중건하고 ‘고산서당’이라 편액하였다.
[건립 경위]
퇴도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유허비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고산서원의 옛터를 알리고자 지역 유림이 건립하였다.
[위치]
퇴도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유허비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 산22번지 고산서당 내에 있다.
[형태]
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는 화강석 재질에대석(臺石), 비신(碑身), 개석(蓋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높이 96㎝, 너비 47.5㎝, 두께 19㎝의 크기이다.
[금석문]
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의 전면에는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退道李先生愚伏鄭先生講學遺墟碑)’라는 비제가 한자로 적혀 있고, 후면의 비문에는 고산서원에 대한 소개와 서원 훼철에 대한 안타까움을 한자로 기록하고 있다.
[현황]
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는 고산서당 내에 있다.
[의의와 평가]
서원이 철폐된 후 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유허비를 세워 옛터를 보존한 결과, 다시 이곳에 서당을 건립할 수 있었다. 2020년에는 서당 뒤편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