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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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Jangchigi |
이칭/별칭 | 공치기,타구놀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심도희 |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주로 정월 초나 초봄 농한기에 행하는 공치기놀이.
[개설]
장치기는 농한기인 겨울철과 초봄에 행하는 민속놀이이다. 지역에 따라 공치기, 타구놀이 등으로 일컫는다. 대구광역시에서는 여러 사람이 같은 수로 편을 나누고 긴 나무막대를 이용하여 공을 쳐서 상대의 골문에 넣거나 결승선을 통과하면 이기는 식으로 놀이한다.
[연원]
장치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권1의 918년(태조 원년) 9월 갑오조에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볼 때, 고려 이전의 삼국시대에도 널리 행하여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격식을 갖춘 ‘장치기 놀이 마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 장치기는 궁중이나 상류사회에서만 행하여졌으나, 조선 후기가 되기 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민간으로 흘러 전통놀이로 변천되었다. 말을 한 채로 즐기던 공놀이인 격구(擊毬)에서 비롯되었으며, 오늘날의 필드하키와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다.
[놀이 도구 및 장소]
장치기의 놀이 도구는 채와 공을 쓰는데,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공은 깡통을 쭈그려 만들기도 하였고, 긴 막대기는 물푸레나무를 휘어서 만들었다. 놀이 장소는 넓고 평평한 장소라면 어디에서나 놀 수 있다. 장치기는 달서구 이곡동에서는 농한기에 땔감을 비축하려고 산에 나무하러 갔을 때 자주 하는 놀이였고, 남구 봉덕동에서는 가을 추수 후 겨우내 공터에서 마을 청소년들이 모여서 하는 놀이였다. 주로 겨울에 논바닥에서 동편과 서편으로 갈라서 놀았다고 한다.
[놀이 방법]
장치기는 경기를 할 때 두 편으로 나누는데, 인원은 보통 여섯 명이 한 팀을 이루고 각 팀의 한 명은 문을 지킨다. 경기장 중앙선 안에 원을 그린 다음, 공을 놓을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서 1보와 7보의 반경으로 원을 그린다. 중앙선에서 좌우 각각 50보 정도의 거리에 돌로 골문을 만든다. 골문의 크기는 경기장의 크기에 따라 정한다. 옆선을 그어 장치기 공이 선 밖으로 나가면 상대의 공이 된다. 장치기 채로 공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골문에 넣어 승부를 결정한다. 골문은 골문지기를 세워서 장치기 공을 막는다. 공격수들이 공을 몰고 갈 때에는 서로 “얼러 얼러”라고 힘차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장치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한 가지는 줄을 쳐 놓고 그 위로 공을 높게 넘기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골문 없이 땅에 선을 그어 놓고 줄은 치지 않고 열 사람이면 다섯 사람씩 나누어서 먼저 공을 쳐서 넘기면 이기는 방식이다. 대구 지역에서는 양자를 절충한 장치기를 행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장치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에 청년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대구에서는 1931년 장치기협회가 조직되어 대구 계성학교 생도와 대구 전체 팀 간에 장치기 시합이 열렸는데, 이 경기에서 계성학교가 우세하였다고 한다. 장치기는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놀이로서 우리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청소년들의 체력을 길러 주었다. 또한 겨울철 농촌에서 도박과 음주에 빠지기 쉬운 청년들에게 정신과 육체를 건강하게 단련하게끔 하는 역할을 하였다.
[현황]
해방 후 장치기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전통적인 놀이로서 연행되고 장려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중반 급격한 도시화·현대화로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전통적인 민속놀이의 전승이 끊기면서 대구 지역의 장치기도 소멸하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