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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969
한자 七星舘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지명/시설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 104-24[향촌동 5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관|개장 시기/일시 1916년 10월연표보기 - 칠성관 개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칠성관 폐관
최초 설립지 칠성관 -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 104-24[향촌동 51]지도보기
성격 극장

[정의]

일제 강점기에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에 있던 극장.

[건립 경위]

칠성관(七星舘)은 1916년 10월에 오카모도[岡本]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변천]

칠성관은 대구부 촌상정(村上町) 51번지,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 51번지 향촌주차장 자리에 있었다. 1917년 10월 말에 개관 1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시보』에 연재한 소설 『かわかぬ袖』를 각색한 동명의 영화를 상영하였다. 당시 변사는 주임변사 격인 시키시마[敷島]를 비롯하여 쓰카모토[塚本], 마스모토[增本], 가스가[春日], 후쿠이[福井] 등이었다. 1918년 11월 25일부터 신영화 신파비극 「부활극(復活劇)」[전 4권], 구극 「악칠병위경청(惡七兵衛景淸)」[전 3권], 서양극 「우담화」[전 2권], 실사(實寫) 「화보(畵譜)」, 골계 「男か女か」, 희극 「변장가(變裝家)」 등을 상영하였다. 1923년 10월 전국특산품진열대회협찬회에서 제작한 「대구안내도」 광고에 대구좌, 대송관과 함께 등장하므로 그때까지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후 대영관(大榮舘)[다이에이칸], 만경관(萬鏡舘)[1927년 5월 18일 만경관이 화재로 전소되자 이제필이 대영관을 빌려 1929년 1월 1일에 만경관이 신축 재개관할 때까지 ‘만경관’이란 관명을 사용하여 영업하였다], 대경관(大鏡舘), 호락관(互樂舘) 등으로 관명을 바꾸었으며, 1938년 7월 9일 화재 이후 폐관한 것으로 짐작된다.

[구성]

칠성관의 수용 인원은 500명이었다. 무대는 넓지 않았으며, 바닥에 다다미를 깔았다.

[현황]

현재 칠성관 터는 향촌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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