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4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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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景毅齋 思誠齋 |
영어공식명칭 | Gyeonguijae·Saseongja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 |
시대 | 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충희 |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동에 있는 김문기와 김귀송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
[개설]
경의재(景毅齋)는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1399~1456]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재실이다. 김문기는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후 1731년(영조 7) 조정에서 김문기의 관작을 복관하였고, 1757년(영조 33)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다. 재실 이름을 ‘경의재(景毅齋)’라고 한 것은 김문기의 시호인 ‘충의(忠毅)’에 경모(景慕)한다는 의미를 더한 것이다.
사성재(思誠齋)는 김녕김씨(金寧金氏) 노곡동 입향조인 김귀송(金貴松)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김귀송은 김문기의 7대손인데, 선조인 김문기가 경상도아사(慶尙道亞使)로 대구에 부임하였을 때 금호강 변에 있는 노곡동 지역을 즐겨 찾았다는 것을 알고 노곡동으로 이거하여 조상을 숭모하며 살았다고 한다.
[위치]
경의재와 사성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노곡로4길 31-5[노곡동 204]에 있다. 앞에는 금호강이 흐르고 뒤에는 함지산이 있다.
[변천]
경의재는 1900년에 창건되어 1991년에 중건하였다. 사성재는 경의재를 중건한 1991년에 창건되었다.
[형태]
경의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사성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현황]
김문기의 유허비 비각인 태충각(泰忠閣)을 중심으로 비각의 좌측에는 경의재가, 우측에는 사성재가 자리 잡고 있다.
[의의와 평가]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하여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 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의하여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김문기를 추모하는 재실인 경의재는 사육신의 충의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