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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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又烈 |
영어공식명칭 | Yoon Uy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 윤우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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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4년 11월 19일 - 윤우열 조선 청년단체 연령제한조사연구위원회 위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11월 - 윤우열 철도인부조합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월 11일 - 윤우열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1월 - 윤우열 허무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월 12일 - 윤우열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월 12일 - 윤우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5월 5일 - 윤우열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2월 7일 - 윤우열 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출소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5월 23일 - 윤우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7년 - 윤우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서울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전조선노농대회 대구 대표 준비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윤우열(尹又烈)[1904~1927]은 190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윤필오(尹弼五)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고려공산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대구에서는 대구제4청년회·철성단·신사상회·경북사회운동자동맹 등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윤우열은 1924년 11월 19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집행위원회 간친회에 참석하고 조선 청년단체 연령제한조사연구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11월 대구역 하역 노동자 간의 상호구제를 도모하는 철도인부조합을 조직하였고, 12월 16일 개최된 ‘대구제4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윤우열은 1925년 1월 11일에 열린 서울청년회 제4회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의 결의 사항은 조선 해방과 무산계급 해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1월 22일 대구제4청년회는 ‘레닌 서거 1주년’을 기념하여 추도식을 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윤우열은 하은수(河銀水)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끌려가 구류 처분을 받았다. 얼마 후 윤우열은 대구제4청년회 기관지 『제4청년』의 발행책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윤우열은 1925년 2월 무렵 대구제4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사상단체인 신사상회 창립에 참여하였고, 7월 대구제4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에 참여하여 명칭을 대구청년동맹으로 변경하는 데 일조하였다. 8월에는 예천 형평사원 습격 사건과 현풍 형평사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지역의 사회단체와 함께 예천형평사사건대책협의회 구성에 참여하였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뒤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 무렵 윤우열은 서울계 입장에서 조선공산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5년 2월 22일 서울계는 경상북도 상주에서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를 개최하여 화요회와 북풍회의 경북노농운동자간친회에 대응하였다. 이후 서울회계가 경상북도 지역의 지도 기관으로서 경북사회운동자동맹을 조직하자 윤우열은 강택진·허일·김홍묵·지경재·진평헌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윤우열은 3월 10일 김천에서 도내 14개 단체가 참가하는 경북지방청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과정에서 경북지방청년대회에 비협조적이었던 대구청년회 제명을 조선청년총동맹에 건의하였다. 고려공산동맹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1925년 4월에 전조선노농대회를 준비할 때 윤우열은 대구 대표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윤우열은 1925년 11월 대구에서 무력적 독립운동을 표방하는 허무당을 만들고 12월에 「허무당선언서」를 작성하였다. 선언서에서 윤우열은 합법 투쟁으로 조선 혁명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는 사람은 저능아라고 규정하고, 폭력 투쟁의 독립 노선을 제시하였다. 그 뒤 서울의 한성강습원과 조선청년총동맹 사무실에서 「허무당선언서」를 인쇄하여 1926년 1월 초에 우체국을 통하여 조선 각지의 신문사·통신사·은행·회사 등 주요 단체와 일본의 각 정당 및 잡지사 등지에 발송하였다.
「허무당선언서」를 탐지한 일제 경찰은 신문 게재를 금지하고 수사를 시작하였다. 1926년 1월 8일경 일제 경찰은 「허무당선언서」의 작성과 배포가 윤우열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관련자들이 속속 검거되기 시작하였다. 윤우열은 1926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소속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6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우열은 1927년 2월 7일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출소한 뒤 대구 집에서 요양하다가 5월 23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윤우열의 공적을 기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